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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기다리는 투자, 맥주공장서 위스키를 만들다

중앙일보 2019.12.31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49) 

 
일본 시가현 나가하마시. 이 곳에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가 있다. 지난 1996년부터 크래프트 맥주를 생산하던 나가하마 낭만맥주 주식회사가 세운 증류소다. 지난 2016년 11월, 첫 증류를 시작해 3년이 지났다. 주목할 것은 위스키 생산을 위해 새롭게 증류소를 세운 게 아니라는 점. 기존 맥주 양조장에 증류기만 설치해 위스키 생산을 시작했다. 
나가하마 낭만맥주 양조장 겸 나가하마 위스키 증류소 전경. [사진 김대영]

나가하마 낭만맥주 양조장 겸 나가하마 위스키 증류소 전경. [사진 김대영]

 
건조된 맥아를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 맥주 공정은 ‘분쇄’, ‘당화’, ‘발효’의 순서로 이뤄진다. 위스키는 여기에 ‘증류’와 ‘숙성’ 과정만 추가하면 된다. 보리를 당화해 건조시킨 맥아는 맥주와 위스키의 공통 원재료이기 때문이다. 나가하마 증류소는 이 점에 착안해 위스키 증류에 적합하게 발효가 끝나면, 맥아즙을 증류기로 옮겨 위스키 스피릿을 만들어냈다.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기는 1000L 용량 3개. 2개가 첫 번째 증류를, 남은 1개가 두 번째 증류를 담당한다. 이 1000L 용량은 일본에서 가장 작은 증류기로, 과거 세계에서 가장 큰 증류기였던 아일랜드 미들턴 증류소의 증류기 용량(14만 3740L)의 0.7%에 불과하다. 1회 증류량만 따지면 나가하마 증류기 3개가 1년 동안 만들어내는 스피릿을 미들턴 증류기는 일주일이면 만들 수 있다.
 
사람보다 조금 더 큰 높이의 나가하마 증류소 증류기.

사람보다 조금 더 큰 높이의 나가하마 증류소 증류기.

 
위스키 생산은 맥주 소비가 줄어드는 겨울에 주로 이뤄진다. 겨울에는 맥주 30%, 위스키 70%로 생산한다. 반면에 맥주 소비가 많은 여름에는 맥주 70%, 위스키 30%로 생산한다. 맥주만 만들 때는 겨울에 생산설비를 놀리거나 생산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위스키를 생산해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위스키는 당장 돈을 벌 수 없지만, 숙성을 통해 회사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회사로서는 단기(맥주)와 장기(위스키) 투자를 병행해, 자원활용효율화와 고수익 투자처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분쇄된 맥아가 뜨거운 물과 만나 당화가 일어나는 당화조. 맥주와 위스키 겸용.

분쇄된 맥아가 뜨거운 물과 만나 당화가 일어나는 당화조. 맥주와 위스키 겸용.

 
위스키 생산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1박 2일 증류체험 투어’도 만들었다. 지난 4월 첫 투어의 만족도가 높아 7월부터 월 2~4회씩 정기적으로 모집 중이다. 또 막 생산된 스피릿이 담긴 오크통도 판매했다. 혼자서도 살 수 있고, 여럿이 돈을 모아 살 수도 있다. 일정 기간 숙성을 보장하고, 숙성을 더 길게 하려면 추가비용을 내면 된다. 위스키 마니아는 자신만의 특별한 위스키를 가질 수 있고, 증류소는 위스키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얻는 ‘윈-윈(WIN-WIN)’ 프로젝트다.
 
지난 12월 4일, 나가하마 증류소 투어 내내 위스키 제조과정을 알려주던 증류 책임자 겸 마스터 블렌더, 키요이 타카시 씨는 “맛에 감동을 받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위스키를 만들고 싶다”며 “100년 후에도 많은 크래프트 위스키 팬들을 즐겁게 하고 싶다”며 위스키 제조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다.
 
위스키 스피릿을 맛보는 키요이 타카시 나가하마 증류소 책임자 겸 마스터 블렌더.

위스키 스피릿을 맛보는 키요이 타카시 나가하마 증류소 책임자 겸 마스터 블렌더.

 
지난 2014년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의 외부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전국 곳곳에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생겼다. 이제는 전국 어딜 가도 그 지역의 특색 있는 맥주를 만날 수 있다. 이들 중엔 언젠가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이도 있을 터. 나가하마 낭만맥주 주식회사의 사례를 벤치마킹한다면, 꿈은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스키 생산의 가장 중요한 덕목, ‘기다림’에 대한 각오를 해야겠지만.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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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김대영 위스키 인플루언서 필진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 위스키 덕후이자 싱글몰트 위스키 블로거다. 위스키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위스키와 위스키 라벨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위스키에 대한 지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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