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할복하는 사무라이 뒤의 가이샤쿠, 요즘 왜 그가 생각날까

중앙일보 2019.12.30 09:00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36)

사무라이의 칼날이 복부를 파고드는 찰나. 남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새파랗게 날이 선 검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단칼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파란 날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오랜 시간 실력을 갈고 닦은 훌륭한 가이샤쿠다. 사람들의 할복을 돕는다. 덕분에 사무라이는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간해선 즉사할 만큼 깊게 찌르지 못한다. 출혈로 의식이 사라지기까지 수차례 칼날을 덧대야 한다. 참기 힘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느라 자칫 명예로운 죽음이 비굴해질지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반드시 단칼에 목을 베어내 줘야 한다. 가이샤쿠는 이번에도 깔끔하게 의뢰에 성공했다. 톡톡한 보수를 대가로 받았다. 누군가의 목을 쳐 준 값이다. 이윽고 그는 마을을 떠났다. 또 다른 사람을 목을 쳐주기 위해서.
 
오스왈도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자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 목을 줄에 매달았다. 문명화된 법과 제도를 실현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사진은 영화 '헤이트풀8' 속 한 장면.

오스왈도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자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 목을 줄에 매달았다. 문명화된 법과 제도를 실현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사진은 영화 '헤이트풀8' 속 한 장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헤이트풀8에는 교수형집행자가 등장한다. 그는 '개척지 정의'와 '문명인 정의'를 이야기한다. 개인에게 복수를 허용하면 통쾌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이 개척지 정의다. 이 정의는 감정에 휘둘려서 틀릴 위험이 크다. 희생자가 생길 수 있다. 문명인의 정의는 개척지와는 다르다. 판결 과정을 거쳐 제3자가 교수형을 집행한다. 실수가 끼어들지 않는다.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오스왈도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자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 목을 줄에 매달았다. 문명화된 법과 제도를 실현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사람을 죽일 때의 심정을 아는 자는 교도소밖에는 없다. 그래서 난 그 심정을 물어볼 곳이 없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게 틀림없다. 보통은 사람은커녕 동물조차 쉽게 죽이지 못하니까. 여러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울먹거렸다. 총을 쥐여줘도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나는 그 장면들이 결코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이샤쿠와 교수형집행인은 사람을 죽일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내리칠 때, 혹은 목을 매달 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고통을 줄여줬다는 만족감만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고양감만으로, 그들은 거리낌 없이 사람의 목숨을 수거할 수 있었을까? 사무라이를 검으로 벨 때, 망나니가 칼을 휘두를 때, 단두대의 칼날을 떨굴 때, 잭케보키언 박사가 약물을 투입할 때, 나는 그들이 그런 행위를 반복하면서 가슴에 생채기 하나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설령 흉악한 범죄자가 대상일지라도 어쨌든 사람이다. 뜨거운 피가 살아 흐르는. 하지만 누군가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주어야 한다. 고작해야 조금 특별한 기술을 가졌을 뿐인 평범한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끊어주어야 한다. 자기 손으로. 어쨌든 마지막 방아쇠를. 팡!!!
 
세상에 있는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환자의 아픔은 고스란히 담당의의 몫이 되었다. 자신이 당긴 방아쇠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사진 pexels]

세상에 있는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환자의 아픔은 고스란히 담당의의 몫이 되었다. 자신이 당긴 방아쇠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사진 pexels]

 
지난주에 중환자실 담당의가 유난히 힘들어했다.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했다. 그가 맡은 환자 중 3명이 연명의료 중단을 했다. 단 이틀 사이에 3명이나. 그는 가망 없는 환자들에게서 기계 호흡기를 손수 걷어내야 했다. 가이샤쿠의 칼날처럼 찰나에 끝났다면 덜 힘들었으련만. 그는 기계 호흡기를 떼어낸 후 환자들이 천천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모두 지켜봐야 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모니터에 알람이 울리고, 환자의 생기가 사라지기까지. 십수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눈을 떼지 못하고. 죽음을 지켜보았다. 본인이 호흡기를 떼어낸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게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환자는 더없이 평온하게 고통 없는 임종을 맞이했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세상에 있는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환자의 아픔은 고스란히 담당의의 몫이 되었다. 자신이 당긴 방아쇠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사람을 살리고자 의사가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법을 배워서 의사가 되었다. 그게 유난히 좋아 중환자실을 맡았다. 그런 그에게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이 주어졌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의사가 되었고, 사람을 죽였다.
 
연명의료 중지법이 시행되었다. 인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의사로서 나는 이러한 변화를 환영해 마지않는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내 환자들에게 평온을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렇게 나 자신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당장 오늘 죽음을 선도하면서도, 여태 단 한 번도 가이샤쿠를, 교수형집행인의 철학을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한 번쯤 할복하는 사무라이가 아닌, 뒤에서 칼을 든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가이샤쿠에게 눈길을 줬으면 좋겠다. 그곳에는 어쩌면 나와 같은 의사들의 모습이 겹쳐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힘내라는 한마디를 아끼지 않아 주었으면 한다.
 
담당의가 담배 피우러 간 사이에 든 생각이다.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조용수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필진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특히 그렇다. 10년 가까이, 셀 수 없이 많은 환자의 생과 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각양각색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이제는 죽음이 삶이 완성이란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환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글을 통해 생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