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하경 칼럼] 황교안, 파산한 박근혜로 문재인을 심판할 수 있나

중앙일보 2019.12.30 00:40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정부 집권 전반기의 성적은 낙제점이다. 경제 실정과 외교 참사도 모자라 조국·유재수·송철호 사태까지 터졌다. 대통령 측근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이 사용(私用)됐다. 우리 헌법이 준엄하게 선포한 공화정(共和政)은 특정인이 국정을 농단하지 않도록 한 근대적 장치다. 엄정한 공법의 거울에 비춰 보면 이 정부는 공화정에서 일탈한 중죄를 범했다.
 

문 정부 실정·권력남용 심각해도
한국당은 부동의 비호감 1위 정당
‘도로 친박당’으론 정죄할 수 없어
박 놓아주고 ‘개혁 보수’ 거듭나야

진보 논객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주변에 간신이 너무 많다”고 일갈했다. 그는 “이제 와서 윤석열을 ‘우병우’로 몰아가고 있다”며 “친문 패거리의 기득권에 칼을 들이댔고, 그 적폐들이 청산의 칼을 안 맞으려고 애먼 사람을 잡는 것”이라고 했다. 통렬한 공소(公訴)다.
 
문제는 무능하고 오만한 집권세력을 정죄(定罪)하고 심판해야 할 제1 야당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이다. 한국당의 비호감 비율은 부동의 1위여서 내년 총선에서 ‘한국당 심판론’이 나올 지경이다. 이래서는 제아무리 머리를 깎고, 밥을 굶고, 거리로 나가도 소용없다. 조국 사태에 분노해 광화문에 나갔던 진보나 중도, 합리적 보수세력은 “문재인 정부에 실망했지만 맨정신으론 한국당을 지지할 수 없다”고 고개를 돌린다.
 
황교안 대표의 정치철학과 리더십이 문제다. 극우에 가까운 닫힌 사고와 행동, 빈곤한 상상력은 시대 흐름을 반영한 가치와 비전의 제시를 가로막고 있다. 끊임없이 통합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측근만 챙긴다. 읍참마속(泣斬馬謖)한다며 대대적 인적쇄신을 약속했지만 당해체를 요구한 개혁파 김세연 의원만 여의도연구소장 직에서 쫓아냈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퇴진도 의원총회가 아닌 최고위원회의에서 결정했다. 나경원은 눈물을 흘렸고, ‘절대황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은 한국당의 고질(痼疾 )이 따로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탄핵으로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은 그의 그림자가 아직도 어른거린다. 대통령이 탄핵됐으면 집권당은 스스로 해산하고, 책임이 무거운 친박 의원들은 영구히 정계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당 이름만 바꿨을 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친박은 폐업한 박근혜 정부의 총리였던 황교안을 옹립하고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친황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박이다. 친박은 내년 총선 공천을 좌지우지할 당무감사위와 총선기획단을 완전히 장악했다. 보수 몰락의 시발점이 된 2016년 총선 막장 드라마가 데자뷔된다.
 
친박은 예외적 정치 그룹이다. 주로 영남이 기반이어서 공천이 곧 당선이다. 당이 추락해도 공천만 받으면 나는 산다. 전국과 수도권, 중도 민심을 살필 이유가 전혀 없다. 오직 나의 이익만이 중요할 뿐이다. 민심과 유리된 꼰대정당이 된 이유다. 진보세력이 헛발질해도 “약자를 위하려는 진정성과 공감능력은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과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민주당은 실패한 정책만 바꾸면 다시 지지하지만 한국당은 존재 자체가 싫다”고들 한다.
 
친박의 시조인 박정희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보수 지도자였다. 이승만이 건국했다면 박정희는 가난을 몰아내고 경제발전을 이뤘다. 박정희 패러다임에는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을 위한 역할공간이 부재(不在)했다. 87년 체제는 박정희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돌려보낸 6월 시민항쟁의 전리품이었다. 박정희의 후광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박근혜가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탄핵당한 사건은 역사적 퇴행이 시정된 분수령이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엎드려 있던 친박이 다시 한국당의 주인이 된 것은 시대착오적 흐름이다.
 
진보세력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했다.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공수처가 탄생하면 살아 있는 권력과 싸우는 검찰의 칼도 무뎌진다. 내년 총선에서 한국당이 무너지면 의회에서도 진보는 압도적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집권세력의 과속주행과 실정을 견제할 장치가 전무한 상태가 된다.
 
보수세력이 부활하려면 좀비정당 한국당을 미련없이 해체해야 한다. 시대와 호흡하는 새로운 체질의 보수 정당을 만들어 국민이 지지할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 개발 독재라는 유리한 정치지형을 업고 쉽게 권력을 독점하고 안주하던 불량 DNA를 불태워야 한다. 경제와 기업을 살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성장전략을 제시하고 빈부격차를 완화하기 위한 사회통합적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안보를 강조하되 낡은 반공보수에서 벗어나 남북화해에도 전향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확고한 북한 비핵화와 균형잡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초정파적으로 수립하는 데 참여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불안한 진보에만 맡기면 안 된다. 레드 컴플렉스에서 자유로운 보수가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하고, 노동계와 통하는 진보가 노동개혁에 앞장서면 범부(凡夫)의 일상이 편안해질 것이다.
 
보수야당이 선제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그래야 진보 집권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러러면 이제는 박근혜를 놓아주어야 한다. 국민은 건강한 보수야당을 아낌없이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이하경 주필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