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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의 시선] 이 정부의 금기어 ‘원전’

중앙일보 2019.12.30 00:31 종합 32면 지면보기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있어야 할 게 안 보였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경연)이 격주간으로 내는 보고서 ‘세계원전시장 인사이트’ 얘기다. 각국의 원전 관련 동향과 정책 분석 리포트 등을 싣는 간행물이다. 쏠쏠한 정보가 많아 챙겨보던 보고서였다. 이게 소식이 끊겼다. 에경연 홈페이지에 올라온 건 11월 29일 자가 마지막이다. 그다음 호인 12월 13일 자를 만들기는 했다. 수백 부를 찍어 정부 부처를 비롯한 관계 기관에 돌렸단다. 그래 놓고는 늘 올리던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았다.
 

탈원전 비판 내용 담은 보고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지도 못해
합리가 이념 앞에서 떨어야 하나

사정이 궁금했다. 에경연에서는 공식적인 답을 얻지 못했다. 알음알음 알아보니 머리글인 정책 제언이 화근(?)이었다. A교수가 쓴 글로, 탈원전에 비판적인 내용이었다. ‘한국은 탈원전에 따라 설계수명(1차 운영허가기간)이 끝난 원전을 바로 폐기한다. 이에 비해 미국처럼 20년 연장 가동하면 260조원 이익이 생긴다’는 등의 분석이다. 모델이 몹시 단순하기는 했지만, 계산 논리 자체에 별 하자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정부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인쇄본을 배포한 뒤 에경연에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황한 에경연은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을 미뤘다. 정부를 불편하게 한 정책 제언은 다음 호 뒤쪽에 슬며시 넣어 올리려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에경연이나 정부 측 공식 해명이 아니기에, 이 같은 전말은 사실과 약간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논리·합리와 연구자의 양심이 탈원전이란 이념 앞에서 벌벌 떨어야 한다는 점이다. 2020년을 코앞에 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하긴 정부 관료로서는 탈원전 비판을 놔두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의지가 워낙 단호하니까. 지난해 두 차례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와의 만남에 참석했던 인사도 “(탈원전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한 치 양보 없이 완강하더라”고 전했다. 토론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대체 왜 그럴까. 원전 재난 영화 ‘판도라’를 보고? 그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픽션인 영화에 넘어가 논리·합리 따지지 않고 정책을 밀어붙인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한 때 벌어졌던 원전 비리 때문에? 그건 비리를 들어내면 된다. 애꿎은 원전을 타박해 전기요금 상승에 전력수급 불안, 온실가스 배출 증가까지 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지원금 싹쓸이와 임금 체불을 일으킨 ‘태양광 마피아’까지 탄생시켜 가면서 말이다.
 
아무튼 정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탈원전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7000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한 월성 1호기마저 영구정지키로 했다. 아무래도 뒤탈이 날 것만 같다. 애초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월성 1호기 폐기를 마음먹은 것부터 미스터리였다. 컨설팅 결과를 감추고 “경제성 없다”고 꾸며대 이사회에서 정지 결정을 끌어냈다. 그런 한편에서 한수원은 “원전 이용률을 높이는 게 최우선 목표”라는 경영목표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용률을 높이겠다면서 거액을 투자한 월성 1호기는 멈춘다고?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월성 1호기 영구정지는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올라갔고, 원안위는 크리스마스 전날 덜컥 승인했다. 한수원의 배임 가능성을 감사원이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승인을 강행했다. 당초 영구정지는 24일 안건에 없었으나 나중에 끼워 넣기까지 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한수원과 원안위 결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수군거림이 퍼지는 것은.
 
지금 세계는 원전을 다시 돌아보는 중이다. 유럽 의회는 지난달 ‘온실가스를 뿜지 않는 원자력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수단이며, 유럽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을 보장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설계 수명 40년을 넘어 80년까지 원전 가동을 연장하고 있다. 탈원전 종주국 격인 스웨덴에서도 이젠 국민 78%가 원전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탈원전이 대세’라고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정보가 차단된 듯하다. 새만금 태양광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은 이런 의심의 농도를 한층 높였다. 여기저기서 반대하자 문 대통령은 “다른 지역도 태양광을 하고 싶어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당황스럽다”고 했다. 전국 각지의 태양광 반대 시위 소식이 대통령 귀에 들어갔다면 이런 말이 나올 리 없다. 찜찜하기 그지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실장 곽영주까지 떠오른다. 그는 대통령 이발사들에게 무조건 “다 잘 돼 갑니다”라고 하도록 지시했다. 민심과 현실을 대통령이 알까 두려웠던 게다. 혹시 지금도 민심 차단 장벽이 청와대 안에 둘러쳐진 것은 아닐까. 설마 그럴 리야. 지금은 2019년 말, 이곳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다.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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