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학이시습의 즐거움…글쓰기, 권하고 싶은 1번 타자

중앙일보 2019.12.29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45)  

 
오늘 같은 날은 가지치기 좋은 날. 잎새 다 떨군 앙상한 가지들은 군더더기 없는 진실이고, 나는 집 주변 관리되지 않은 잔가지들을 쳐내고 자르고 옮겨 화덕 옆에 모은다. 무어라 다 쓸모가 있겠거니와 사람이 제 편의로 그러는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라. 
 
원두막 높이 앉아 빈 들판을 바라보니 적막강산 찬바람 속에 겨울은 제자리. 찬바람 여린 햇살 속에서도 나는 봄을 본다. 도원(桃園)을 본다. 겨울은 그래서 좋다. 모두 비워진 후의 기다림, 온 세상이 하얗고, 장작 난로가 타고, 개들이 뛰어놀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책 읽는 곡우가 있는 아침. 오늘 하루만은 그냥 이대로 무위(無爲)이고 싶다. 힘겨운 날들 긴 기다림 끝 하루쯤 그대로 자연인들 어떠하리. 현상 너머의 현상을 보고,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 깊은 곳 함께 하는 이 시간엔 이 순간을 미안해하는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겠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는 이 순수가 아름답다. [사진 권대욱]

 
개는 아무 이유 없이 짖지 않는다. 으르렁거리고 계속 짖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 산막에 누리와 대백이가 필요한 이유다. 어제 대백이가 그렇게 짖어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뱀이었다. 대부분 독 없는 뱀들이고 절대 먼저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짖어주니 참 좋구나. 잡기까지 하면 더 좋으련만 그건 무리인가? 오늘도 작업이다.
 
벌목 사장한테 나무 한 차 부려 달라 했더니만, 쌓지는 못해 “권 회장이 쌓으시오” 하며 요렇게 해놓고 갔다. 이걸 어찌 옮기나? 어디다 옮기나? 비 맞으면 어쩌나? 한참을 심란해 하다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생각 하나로 정리한다. 이번 겨울엔 우선 집 주변에 쌓아놓은 장작과 통나무로 먼저 때고, 그 빈자리에 한 땀 한 땀 옮겨놓으리라. 혼자 하다 힘들면 아우들 올 때 좀 부탁하고, 그렇게 쌓다 보면 또 봄 여름 가을이 올 것이고, 그때 되면 잘 말라 있으리니 도대체 심란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엔 이처럼 생각 하나로 정리될 것들이 많이 있다. 산막은 스승이다. 많은 걸 가르친다.
 
신선한 새벽에 홀로 앉아 푸른 산 바라보며 글 쓰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글 쓰는 즐거움이야말로 내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글의 재료다. 좋은 술 보면 좋은 안주가 생각나고, 좋은 안주 보면 좋은 술이 생각나듯 글 또한 마찬가지다. 나에게 좋은 글, 좋은 시 보내주는 사람들은 복 받을 거다. 그들의 글과 시에 나의 영감과 생각을 보태 또 하나의 행복을 만들어본다.
 
좋은 글 읽고, 좋은 글 하나 쓴 느낌이 어떤 줄 아는가? 저 심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보물의 창고에 또 하나의 보석이 떨어져 내는 명징한 소리를 듣는 느낌이 어떤지 아시는가? 가슴이 꽉 채워진 느낌, 온 세상을 얻은 느낌이다. 그리하여 내가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이 된다. 내가 해보니 좋은 것, 그래서 권하고 싶은 것 중 제1번이 글쓰기다. 배우고 또 익히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즐거움을 이 나이에라도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이 긴 밤 무엇으로 지새우며 이 이른 아침 무엇으로 머리를 밝히겠는가? 읽고 쓰기에 결코 게으름이 없을 것이다.
 
화톳불 쐬며 겨울의 한기를 이겨내 본다.

화톳불 쐬며 겨울의 한기를 이겨내 본다.

 
왜 이렇게 잠이 오나 모르겠다. 어제 낮 6시간,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12시간을 잠 귀신이 씌운 것처럼 깊고 죽음 같은 잠을 잤다. 시장기 돌던 차 곡우의 국수 삶아주겠다는 말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참, 사람 사는 거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4시에 점저로 한다 하니 그때까진 그 기다림으로 즐거울 것이다. 모처럼 더운물 샤워라도 하면 그 기다림이 더 즐거울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곳 산막 전기 없고 수도도 없던 시절, 서울 돌아가 따뜻한 물 샤워 한 번 하면 원이 없겠다던 그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희망은 크고 무거운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작고 소박한 것에서부터 온다. 풍요보다는 결핍, 채움보다는 비움으로부터 오는 것. 조그만 것, 작은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마음이야 말로 희망일지 모르겠다. 오늘같이 햇살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여 봄날 같은 겨울날에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보자.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권대욱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필진

[권대욱의 산막일기] 45년 차 직장인이자 32년 차 사장이니 직업이 사장인 셈이다. 일밖에 모르던 치열한 워커홀릭의 시간을 보내다 '이건 아니지' 싶어 일과 삶의 조화도 추구해 봤지만 결국 일과 삶은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애써 구분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삶 속에 일이 있고 일속에 삶이 있는 무경계의 삶을 지향하며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문막 산골에 산막을 지어 전원생활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60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귀중한 삶과 행복의 교훈을 공유한다.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