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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필 협연 거절한 죄? 쇼팽, 왕실 연주회 초청 못 받아

중앙일보 2019.12.27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56)

 
 프레데릭 쇼팽. 안토니 콜베르크.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안토니 콜베르크.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으로서는 런던 방문이 두 번째였다. 약 10년 전, 미지근해만 가는 약혼녀 마리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그를 친구들이 런던으로 이끌었었다. 우울한 그의 기분을 전환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때 그는 런던에 가서도 기분을 풀지 못했다. 호텔 밖 외출도 자제했고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었다.
 
그에게 런던의 기억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혁명으로 어지러운 파리는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번 방문도 즐거운 기분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 상황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몰린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4월의 런던은 아직 추웠다. 비도 자주 왔다. 무엇보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스모그가 덮고 있어서 런던은 어두컴컴했다. 매캐한 석탄 냄새를 품은 안개 속에 사람들도 쇼팽의 마음만큼 의기소침해 보였다. 그의 무거운 기분은 더 심해졌다. 숨이 막혔다.
 
쇼팽을 초대한 제인은 예민한 그가 불편하지 않게 많은 것을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다. 방은 세심하게 갖춰져 있었다. 노트 페이퍼에는 쇼팽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고 쇼팽이 좋아하던 코코아도 준비되어 있었다. 도착 며칠 후 빛이 잘 드는 큰 방을 얻었다. 집주인은 세입자가 유명한 음악가라는 것을 알고 일주일에 5기니 받던 세를 배로 올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 제인 스털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쇼팽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영국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나아가 자신과 결혼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쇼팽이 빨리 영국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며칠이 지나자 모처럼 햇빛이 났다. 마음이 급한 제인은 쇼팽을 재촉했다. 그들은 빡빡한 스케줄을 따라 음악계의 유명인사들과 여러 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마차로 달렸다. 제인은, 쇼팽이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하려 했다.
 
하루 종일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쇼팽은 죽을 맛이었지만 제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면담, 방문, 저녁 초대 모임은 끊이지 않았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다. 효과는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주 청탁이 들어왔고 레슨받으려는 학생들도 나타났다.
 
파리에서 쇼팽을 잘 챙겨주었던 베티 로스차일드 남작부인은 런던에 있는 시동생 부부에게 도움을 부탁해 두었다. 베티의 동서는 쇼팽에게 런던의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해주었다. “런던에서는 파리만큼 못 받아요.” 그녀가 권하는 대로 레슨비는 1기니(약 15프랑 추정), 살롱 연주에는 20기니를 받았다.
 
혁명의 물결로 대륙은 혼란했고, 이름있는 피아니스트는 모두 런던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피아니스트 탈베르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좁은 무대를 두고 음악가들 사이에 경쟁이 심했다. 쇼팽이 가족처럼 여겼던 폴린 비아르도 외에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던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도 있었다. 쇼팽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의 무대를 보고 그녀의 재능에 감탄했다.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에서연기하는 제니 린드. 제니 린드는 당시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프라노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에서연기하는 제니 린드. 제니 린드는 당시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프라노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은 대단히 명예로운 런던 필하모니 협회의 협연초대를 거절했다. 계획된 리허설이 부족해서 좋은 앙상블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큰 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에는 과거에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쇼팽이었다. 이미 쇠약해진 쇼팽은 더욱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쇼팽은 소규모의 저택 연주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 여왕이 참석하는 서덜랜드 공작부인의 아기 영세기념 연주회는 수락했다. 왕족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영국 여왕은 아기의 대모였다. 부인의 저택은 궁전보다도 컸다. 연주회에서 여왕과 몇 차례 얘기도 주고받은 쇼팽은 기분이 좋았다. 왕실연주회에로의 초청도 기대했다.
 
그런데 파리와 달리 영국의 상류층 사교 관계에는 신경을 써야 할 많은 관례가 있었다. 객원 연주자는 그 단체의 감독에게 직접 찾아가서 인사와 청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쇼팽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대에의 거절 의사를 직접 대면하여 전하는 것이 예의였다는 것도 몰랐다. 쇼팽은 자신의 필하모니 협회의 초대에 대한 거절방식에 협회 감독의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협회 감독은 영국 왕실의 음악 기획자이기도 했다. 당연히 왕실에의 초대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 런던에서 쇼팽에 대한 대우가 달랐던 데는 다른 근본적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 쇼팽의 위치는 높았다. 살롱을 통해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파리의 상류사회에 명성을 쌓은 그였다.
 
음악 소비자들에게 대한 접근 방식이 파리에서와 비교하여 런던에서는 달랐다. 그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무대를 통해 자신을 알려야 했다. 무대의 피아니스트에게 청중들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기대했고 쇠약한 그는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객석 뒷자리에서 그의 연주는 들리지도 않았다. 리스트나 탈베르크의 힘차고 화려한 연주와 비교되었다.
 
런던 이튼 플레이스 99번지 건물에 쇼팽의 첫 런던 대중연주회를 기념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런던 이튼 플레이스 99번지 건물에 쇼팽의 첫 런던 대중연주회를 기념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사실 서덜랜드 공작부인 저택 연주회에서도 쇼팽은 영국여왕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날 여왕이 일기에 기록한 것은 같이 공연한 가수들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병색이 완연하고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쇼팽은 런던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주회를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유명 배우의 딸로 부유한 남편을 둔 아델라이드 사토리스부인은 쇼팽을 이해했고 동정했다. 부인은 쇼팽에게 런던 중심의 저택을 연주회를 위해 빌려주었다. 이것은 런던에서의 첫 대중연주회였다. 한 장에 1기니 하는 티켓은 모두 팔렸다. 쇼팽은 최선을 다했다. 그의 파워를 지적하는 평도 있었지만 “현시대의 어떤 연주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라는 평도 있었다.
 
2주 후에는 팔머쓰 경의 저택에서 또 연주했다. 문예협회의 평에 의하면 사토리스부인 저택에서 보다 더 많은 힘과 활력을 보여줬다. 이 연주회에는 폴린 비아르도가 특별히 초대되어 쇼팽의 마주르카를 편곡한 곡을 몇 개 불렀다. 그 곡은 노앙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작곡하고 연주했던 곡이어서 쇼팽을 추억에 젖게 했다.
 

쇼팽의 1848년 7월 런던 팔머쓰 저택연주회의 공연 프로그램. [사진 Wikimedia Commons]

 
금방 런던의 시즌이 끝났다. 왕실은 여름 영지로 떠났다. 상류층 가족도 시골의 성으로 갔다. 학생도 연주회도 사라졌다. 수입이 끊어졌음을 의미했다. 런던의 상류사회에 발을 제대로 붙이기도 전이었다. 비싼 방세는 부담이 되었고 마차, 마부, 하인에게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았다. 이탈리아 출신의 하인은 주인이 궁색하게 굴면 경멸의 빛을 드러냈다. 쇼팽은 새 하인을 찾았다.
 
건강은 더 악화해 각혈을 계속했다. 절약하려 했지만 돈 걱정에 잠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쇼팽이 살아가는 동안 돈 걱정을 안 한 때가 없었다. 수입에 균형을 맞추지 못한 지출이 더 문제이긴 했지만, 말년에 오면서 벌이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상드와 같이 살아가는 동안 그 걱정은 그나마 덜했었다.
 
런던의 여름은 더웠다. 시커먼 스모그 속에, 찌는 더위는 숨통을 조였다. 향수와 신경쇠약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져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동안 번 돈 중 큰 부분은 밀린 청구서를 청산하는 데 썼다. 런던에서 한 시즌 더 살아남으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주머니는 비어갔고 스케줄 표에 레슨, 연주회는 물론 사교 모임의 계획도 잡혀있지 않았다.
 
짙은 안개 때문에 한낮에도 거리 반대편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미래도 마찬가지로 깜깜했다. 파리에서는 여전히 시가전이 끊이지 않았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멀리 떨어져 나왔지만 그는 바보처럼 그리움에 고통받고 있었다. 파리의 친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는 여전히 상드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공동묘지 스케치를 그려 넣었다.
 
제인 스털링이, 쉬기도 하고 연주회도 할 겸 그녀의 고향 스코틀랜드로의 투어를 제안했다.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구원자였다. 8월 5일 이른 아침, 쇼팽은 에든버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다음 편은 런던에서 쇼팽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제니 린드에 대한 이야기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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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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