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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한진가엔 부끄럼이란 게 없나

중앙일보 2019.12.27 00:33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땅콩 부사장’으로 더 알려진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동생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겨냥해 칼을 뽑았다.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A4 용지 한장짜리 입장문의 법률적 수사를 다 빼면 요지는 “네 멋대로 경영 말라. 내 몫을 내놔라”다. 조현아 씨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나 여론은 참담하다. “터질 게 터졌다” “대한항공이 조 씨 거냐” “집안 꼴 좋다”라며 조 씨 3세들의 경영권 다툼을 한 목소리로 꾸짖고 있다. 동생 조 회장 측이 양보할 뜻이 없음을 밝혔으니 당분간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당사자들도 고통스럽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진짜 고통은 그런 싸움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 몫이다.
 

터질 게 터진 금수저 남매의 난
작게는 선친 이름에 먹칠하고
크게는 반기업 정서 부추길 것

우선 주춤하던 반기업 정서가 다시 커질 것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무엇보다 기업가 정신이 필요할 때 비수를 등 뒤에서 들이댄 꼴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물을 수는 있겠다. 돈 놓고 가족끼리 싸우는 게 어찌 재벌뿐이랴. 일반 가정은 물론 다른 중소·중견 기업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재벌, 특히 한진가 3세에 비난이 쏠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땅콩 회항’ ‘물컵 갑질’처럼 유별나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선 ‘대표성 휴리스틱 효과’라고 부른다. 예컨대 비행기는 사고가 한 번 나면 대개 전원 사망의 ‘대형 사고’다. 그러니 기억에 훨씬 잘 남는다. 그 바람에 자동차보다 더 위험하다고 느낀다. 국민 뇌리엔 땅콩과 물컵, ‘갑질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니 손가락질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또 대한항공? 재벌은 다 그래.” 가뜩이나 친노동으로 기울어진 정부 정책이 더 반기업으로 쏠릴 빌미만 줄 것이다. 용서받지 못할 대죄다.
 
둘째,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은 무슨 죄인가. 가뜩이나 항공업이 위기다. 금호아시아나는 HDC 현대산업개발에 넘어갔다. 이스타 항공은 애경그룹에 팔렸다. 대한항공도 올해 들어 실적이 급격히 나빠졌다.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6% 줄어든 964억원에 그쳤다. 지난 10월엔 창사 후 첫 무급휴직을 실시했고 이달 들어 6년 만에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내년 상황은 더 나쁘다. 저비용항공사 2곳이 더 생기고 주인 바뀐 아시아나항공이 본격 경쟁에 나선다. 이런 판에 오너 리스크가 얹어지면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2만 임직원과 수천만 고객이 불안해 할 것이다.
 
셋째, 연금사회주의를 부추길 것이다. 이 정부 사람들은 대기업=갑질=적폐로 본다. 3·4세 세습 경영에는 특히 비판적이다. 국민연금까지 동원해 기업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정부 아닌가. 대한항공이 첫 타깃이기도 했다. 이 정부 초기 증권가엔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대한항공을 주인 없는 공기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찌라시가 돌기도 했다. 그 바람에 너무 걱정하다가 선대 조양호 회장이 돌연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채 1년도 안 된 일이다. 3세간 진흙탕 싸움이 심해지면 반드시 정부 개입을 부를 것이요, 결과는 좌파 정부 외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싸움은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끝날 것이다. 헤지펀드와 큰 손들 배만 불릴 것이다. 새 주인을 맞은 아시아나항공도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한진가에도 득 될 게 없다. 무엇보다 선친 고 조양호 회장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것이다. 조 전 회장은 지난 4월 호전되던 지병이 갑자기 도져 사망했다. 유언장도 남기지 못했다. 사망 한 달 전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표이사 연임에 실패한 충격이 컸다고 한다. 자식들의 탐욕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세상의 연민과 동정까지 거둬갈 것이다.
 
항공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다. 외국인은 경영할 수 없다. 국가 경제의 큰 그림을 생각하고 경영하라는 뜻이다. 개인 탐욕에 빠져 진흙탕 싸움을 마다치 않는 국가관·경영관으론 감당할 수 없다. 조 씨 남매는 싸우기에 앞서 스스로 물어보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들은 체도 않겠지만 상투적인 한마디를 덧댄다. “지금 이럴 땐가. 아버지 무덤에 흙은 말랐나.”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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