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총리 야스쿠니 참배하면 중국 못 가”…日 외교기밀 공개

중앙일보 2019.12.26 11:42
1987년 방중한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자민당 간사장(오른쪽)이 덩샤오핑 중국 중앙고문위 주석(왼쪽)과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방중한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자민당 간사장(오른쪽)이 덩샤오핑 중국 중앙고문위 주석(왼쪽)과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일본 총리의 1988년 8월 중국 방문 직전 당시 주중 일본대사가 다케시타 총리에게 “야스쿠니신사 참배만은 절대 피해달라”고 진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25일 일본 외무성이 일반에 공개한 외교문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날 외무성은 1955~88년 작성된 15권(6180쪽)의 문서를 공개했다. 외무성은 30년이 지난 기밀 자료를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심사를 거쳐 매년 한 차례씩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日외무성 외교문서 1680쪽 25일 공개
88년 방중 앞두고 주중대사가 진언
'다함께 야스쿠니참배' 회장 출신 총리
"동의 사실 누설해선 안 된다" 당부
'오키나와 핵밀약' 관련 문서도 공개
닉슨-사토 "유사시 핵무기 재반입" 밀약

이날 공개된 88년 3월 2일자 외교문서에 따르면 나카지마 도시지로(中島敏次郎) 주중 대사는 “(야스쿠니를 참배하면) 방중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며 “야스쿠니 참배만은 피해달라”고 다케시타 총리에게 말했다. 이는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당시 중·일 관계의 새로운 이슈로 부상한 데 따른 것이었다. 
 
앞서 전임자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총리는 85년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를 공식 참배했다. 전후 최초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케시타 총리까지 야스쿠니를 찾을 경우 양국 관계가 파탄 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전후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전후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카지마 대사는 다케시타 총리가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 출신이어서 특별히 더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 따르면 다케시타 총리는 “그 점은 잘 이해하고 있다”면서 “다만 절대 (이런 동의 사실을) 외부에 말해선 안 된다”고 응했다. 이와 관련,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자민당 보수층을 의식한 발언”이라고 26일 전했다.  
 
외무성은 막판까지도 총리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다케시타 총리의 방중에 앞서 중국에 다녀온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당시 외무차관은 88년 8월 7일자 보고서에서 야스쿠니 문제 등을 예로 들며 “중국 측은 다케시타 총리가 보다 중국을 배려하는 자세에서 구체적인 협력을 추진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적었다.
 
 

"유사시 핵무기 재반입"…'오키나와 핵밀약'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중에는 ‘오키나와 핵밀약’과 관련한 것도 있다.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앞두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일본 총리가 69년 11월 19일 백악관에서 만났다. 이날 양 정상은 ‘오키나와 반환 전에 미군 핵무기를 모두 반출하고, 유사 시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재반입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맺었다. 미·일 양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한다는 데 합의한 사실만 발표했다.  
 
밀약과 관련한 사전 교섭은 공식 외교루트가 아닌 사토 총리의 밀사인 국제정치학자 와카이즈미 케이(若泉敬)와 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 사이에 이뤄졌다.  
 
1969년 11월 19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오키나와 반환 협상 차 백악관을 찾은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왼쪽)를 환영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9년 11월 19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오키나와 반환 협상 차 백악관을 찾은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왼쪽)를 환영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러나 기밀 해제된 외교자료에 따르면 당초 밀약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과 교섭에 나섰던 미국 고위 관리가 워싱턴에 보낸 비밀 전문에는 ‘(핵무기 재반입은)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밀약이 성립한 것은 당시 양국 정권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시노부 다카시(信夫隆司) 니혼대 법학부 교수(정치학)는 마이니치신문에 “미측 군사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오키나와 핵밀약은 필요 없었다”면서 “오키나와 반환을 반대하는 군부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던 닉슨과 ‘핵무기 없는 반환’을 주창했던 사토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사토 총리는 67년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내용의 ‘비핵 3원칙’을 선언한 공로로 7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9년 사토 가문에서 오키나와 핵밀약과 관련한 의사록 원본이 발견됐지만, 일본 정부는 “어떤 것도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