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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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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성탄절 쏟아진 총탄 180발···'김일성 의형제' 독재자 끝장냈다

중앙일보 2019.12.26 07:10
12월 25일은 서방 기독교 세계에선 성탄절(동방정교는 1월 7일)이지만 동유럽 국가 루마니아에선 세속적으로도 뜻 깊은 날이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9년 바로 이날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년)를 처형하고 공산 체제의 숨통을 끊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루마니아 국민이 봉기해 공산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되찾아 현재의 체제를 수립한 국가적인 기념일이 됐다. 루마니아 혁명으로 불리는 이 유혈 사태로 11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3000여 명이 부상했다. 오늘날 루마니아를 있게 만든 날이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딱 30년 전인 1989년 12월 25일
루마니아 공산 독재자 차우세스쿠
공산정권 전복한 임시정부가 처형
경제실패·개인숭배 질린 국민 봉기
비밀경찰 발포로 1100여 명 숨져도
자신의 손으로 자유·민주주의 회복
체제전환 성공, 나토와 EU 가입도
소득 러시아보다 많은 1만2000달러
공산독재 저항한 국민의 용기 덕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수도 부구레슈티에 기갑차량을 타고 출동한 군대. 이들은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온 루마니아 혁명의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로이터=연합뉴스]

1989년 12월 루마니아 수도 부구레슈티에 기갑차량을 타고 출동한 군대. 이들은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온 루마니아 혁명의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로이터=연합뉴스]

 

12월 25일 공산독재 종식의 날로 기념

루마니아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전까지 헝가리가 지배하던 서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영토에 편입해 지금의 국토를 완성한 12월 1일을 국경일(National Day)로 기념한다. 하지만 국경일의 축하 연설 때는 항상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을 거론하며 국민의 힘으로 되찾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긴다. 지난 12월 1일 주한 루마니아 대사관 주최로 서울의 포시즌 호텔에서 열렸던 국경일 기념행사에서 미하이 치옴펙 대사는 “지난해 루마니아 국토를 완성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절 100주년에 이어 올해 민주주의를 회복한 루마니아 혁명 30주년을 맞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2월 22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루마니아 혁명 30주년 기념행사 중 군인들이 군모를 벗어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표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2월 22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루마니아 혁명 30주년 기념행사 중 군인들이 군모를 벗어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표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와 함께 매년 12월 25일을 앞둔 마지막 일요일에 국가적인 기념 행사를 연다. 올해는 22일 수도 부쿠레슈티를 비롯한 전국에서 성대하게 3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고 루마니아 혁명의 희생자를 추모했다.  
1971년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왼쪽) 주석과 만나는 니콜라에 차우세스쿠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그는 반대자를 허용하지 않는 주체사상과 개인숭배에 감명 받아 루마니아에 이식을 시도했다. [중앙포토]

1971년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왼쪽) 주석과 만나는 니콜라에 차우세스쿠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그는 반대자를 허용하지 않는 주체사상과 개인숭배에 감명 받아 루마니아에 이식을 시도했다. [중앙포토]

 

차우셰스쿠, 루마니아를 24년간 철권통치  

30년 전 이날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 과정과 의미를 알기 위해선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차우셰스쿠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견습공으로 일하다 10대부터 공산당 운동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루마니아가 소련에 점령되고 이를 업고 전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권력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을 거쳐 1965년 3월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에 올랐으며, 1967년 12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평의회 의장도 맡았다. 1974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직을 신설해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는 1989년 총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4년간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영감을 얻은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에서 개인숭배 독재를 시도했다. 사진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개인숭배 행사인 매스게임 장면. [위키피디아].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영감을 얻은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에서 개인숭배 독재를 시도했다. 사진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개인숭배 행사인 매스게임 장면. [위키피디아].

 

마오쩌둥 맹종하는 중국 문화대혁명에 감명

차우셰스쿠는 동유럽 공산 독재자 중에서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1971년 동아시아의 공산국가인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장기 통치를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중국에서 그를 맞은 것은 홍위병들이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을 성경처럼 들고 다니며 획일적인 사상과 생각을 강요하면서 반대 세력을 잔혹하게 숙청하고 탄압하는 문화대혁명(1966~1976년)이었다. 이를 본 그는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감명했으며 여기에서 오히려 자신이 펼칠 독재 정치의 영감을 얻었다. ‘마오 주석을 무한히 믿고 받들자(無限信仰毛主席)’는 구호를 곳곳에 걸 어놓고 마오를 신처럼 받드는 개인숭배도 그에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1988년 차우셰스쿠가 집필했다는 사상 서적으로 가득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서점 입구. [위키피디아]

1988년 차우셰스쿠가 집필했다는 사상 서적으로 가득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서점 입구. [위키피디아]

김일성과 의형제, 개인숭배 수입하고 독재

무엇보다 주체사상을 앞세워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이나 ‘위대한 민족의 태양’으로 받드는 북한의 개인숭배 독재체제는 차우셰스쿠에게 매력적인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귀국한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관제 언론에 자신을 북한의 ‘수령’에 해당하는 ‘콘두커도르(Conducător)’나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ţi)’로 부르게 하면서 개인숭배 작업에 나섰다. 카르파티아는 루마니아를 관통하고 동유럽 여러 나라로 이어지는 큰 산맥이다. 북한으로 치면 백두산 정도의 의미가 있다. 그는 나이가 6살 많은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주체사상 서적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소개하게 했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판 주체사상 도입을 시도했으며, 카르파티아 산맥의 김일성이 되려고 시도했다.  
이를 위해 그는 비밀경찰인 세쿠리타테(보안경찰이라는 의미)를 확장해 300만 개가 넘는 도청기로 2000만 국민을 도청하고 감시하게 했다. 이를 통해 반대파나 비판자를 찾아내 숙청하고 침묵시켰다. 반대파가 없어진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는 철권을 휘둘렀다. 특히 자신에 대한 비판을 악으로 몰면서 허용하지 않았다. 국민의 입을 막고 장기 집권을 하면서 그는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부인 엘레나의 모습, 공산독재 정권은 대통령 부부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요했다. [위키피디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부인 엘레나의 모습, 공산독재 정권은 대통령 부부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요했다. [위키피디아]

화학식도 못 읽는 부인을 화학자로 만들어

차우셰스쿠 체제 특징의 하나가 족벌 체제였다. 그는 1980년에는 부인인 엘레나 차우셰스쿠(1916~1989년)를 제1부총리로 임명했다. 차우셰스쿠보다 2살이 많은 엘레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14과목 중 9과목에서 낙제하고 학교를 중퇴했다. 그 뒤 수도 부쿠레슈티의 공장에서 일하다 20대 때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으며 차우셰스쿠를 만나 1946년 결혼했다. 결혼 뒤 공산 정권 아래에서 화학연구소 비서로 일하다 남편이 권력자가 되면서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화학연구소장을 맡았다. 영부인으로 있으면서 100편 이상의 화학 관련 논문을 냈고 여러 권의 화학 서적도 출간해 화학자로 행세하며 명예박사 학위 수집에 열중했다.  
하지만 루마니아 국민은 그의 화학 논문과 서적이 대필된 것으로 의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엘레나가 기초화학식도 모른다는 사실은 국민 사이에서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코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산화탄소를 가리키는 화학식인 CO2를 ‘코도이’로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CO2는 탄소(C) 한 분자와 산소(O) 두 분자가 결합한 화학식인데 각각 읽어야하는 C와 O를 붙여서 ‘코’로 읽고 2를 루마니아어로 둘을 뜻하는 ‘도이’로 읽었다. 한마디로 기초 화학도 모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엘레나가 전 국민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사실은 대통령 부부만 몰랐다. 루마니아 서점에는 엘레나가 쓴 화학 서적과 니콜라에가 쓴 사상 서적으로 가득했다.    
 
지난 12월 22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옛 인민궁전 건물이 루마니아 혁명 30주년을 알리는 조명으로 장식됐다. [AP=뉴시스]

지난 12월 22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옛 인민궁전 건물이 루마니아 혁명 30주년을 알리는 조명으로 장식됐다. [AP=뉴시스]

막내아들에게 권력 세습 준비

그러면서 그는 세습체제를 수립해 막내아들인 니쿠 차우셰스쿠(1951~1989년)에게 권력을 물려줄 준비를 했다. 1982년 그는 당시 32세였던 니쿠를 루마니아 권력의 핵심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내세웠으며 이듬해 루마니아 공산당 청년단 제1서기도 맡게 했다. 누가 봐도 권력 세습을 위한  후계 옹립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부인과 자식 외에도 40여 명의 친척을 능력과 상관없이 요직에 등용했다.  
더 큰 문제는 차우셰스쿠의 욕심이 지나쳤고, 이를 위해 국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그는 외채를 얻어 농업국가인 루마니아의 공업화를 진행했는데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100억 달러가 넘는 빚만 졌을 뿐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차우셰스쿠 부부는 끝없이 사치를 하면서 과시욕을 드러냈다. 외채 위기에도 1984년에는 수도 부쿠레슈티에 화려한 인민 궁전의 건설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주석궁을 본 뒤 그보다 더욱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으려 시도했다.  
그러면서 외화를 확보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농산물을 대거 수출하고 국내 소비를 억제했다. 아침에 우유와 달걀, 빵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 루마니아 국민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2월 22일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루마니아 혁명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젊은이들이 행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2월 22일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루마니아 혁명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젊은이들이 행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경제난에 분노한 국민, 봉기에 나서

독재와 경제난 속에 국민의 분노는 1989년 12월 극에 달했다. 이미 그해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동유럽 공산정권이 해체 위기에 처했으나 차우셰스쿠는 국민 여론과 현실을 몰랐다. 12월 초 서북부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티미쇼아라에서 헝가리계 소수민족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반정부 집회는 12월 17일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확대돼 대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가했다. 차우셰스쿠는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귀국해 12월 21일 대규모 관제 시위를 열었다. 하지만 건설 중이던 인민궁전 발코니에 선 차우셰스쿠는 시위대에 섞인 대학생들의 야유를 받고 물러났다. 그는 군대에 시위 진압을 명령했지만 군은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대의 편에 섰다. 차우셰스쿠의 친위 부대인 세쿠리타테가 발포하며 유혈 진압에 나섰지만 군이 이들에게 대항해 시가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군은 평소 세쿠리타테만 선호하는 차우셰스쿠에 불만이 많았다.  
 
루마니아 혁명 당시 희생된 1100여명의 일름을 새긴 명패. [AP=연합뉴스]

루마니아 혁명 당시 희생된 1100여명의 일름을 새긴 명패. [AP=연합뉴스]

평양 망명 시도했지만 공항으로도 못가고 처형

12월 22일이 되자 차우셰스쿠 부부는 북한으로 망명할 심산으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헬기 조종사는 대공 사격을 당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부부를 중간에 내리게 했다. 한 운전기사는 엔진이 과열됐다고 둘러대며 부부를 고속도로에 내버려두고 사라졌으며, 나중에 탄 자동차의 기사는 이들을 농업박물관에 데려다주고 가버렸다. 근처에 살던 농부는 부부가 그곳에 숨어있다고 군대에 고발했다. 결국 서슬 퍼렇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12월 23일 군대에 넘겨져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당시 들어선 임시정부인 구국전선은 12월 25일 재판에서 반역과 살인, 외화 밀반출 혐의 등으로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즉각 총살로 집행했다. 군부대에서 8명을 상대로 총살 집행 자원자를 뽑았더니 전원 자원했으며 이 중 3명에 각각 30발의 총탄이 든 여섯 자루의 자동소총을 맡겨 부부를 처형하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 발사됐다면 180발의 총탄이 부부에게 쏟아진 셈이다. 90발만 쏘았다는 주장도 있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근처에 있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루마니아는 과거 처형된 독재자 부부에 대한 추모도 허용한다. [위키피티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근처에 있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루마니아는 과거 처형된 독재자 부부에 대한 추모도 허용한다. [위키피티아]

일부에선 이를 두고 재판이 아니라 정치 살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재판을 하면서 차우셰스쿠의 죄상을 전 국민과 전 세계에 알렸어야 했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죄상은 이미 수많은 사람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공산주의 몰락을 겪은 동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유혈사태를 빚은 나라고 기록된다. 그만큼 차우셰스쿠의 독재라 악랄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2016년 5월 루마니아 이지스 어쇼어 기지 개막식에 참석한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가운데 두 사람 중 왼쪽)과 마크 퍼거슨 나토 사령관(오른쪽).[NATO 홈페이지]

2016년 5월 루마니아 이지스 어쇼어 기지 개막식에 참석한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가운데 두 사람 중 왼쪽)과 마크 퍼거슨 나토 사령관(오른쪽).[NATO 홈페이지]

 

루마니아, 체제 전환해 나토와 EU 가입  

루마니아는 이렇게 독재자를 제거하고 공산 독재체제를 끝냈다. 그 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며 유럽 민주주의 동맹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루마니아는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2007년 유럽연합(EU) 회원국이 각각 됐다. 2018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2285달러로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1만1327달러)보가 높다. 공산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전환한 국가 중에서 중간 정도를 차지한다. 이 모든 성과는 30년 전인 1989년 성탄절에 과감하게 독재자와 공산 체제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선택한 루마니아 국민의 용기 덕분일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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