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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중앙일보 2019.12.26 00:31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일본을 여행하며 맨 처음 느끼는 건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점이다. 아주 외진 곳도 예외가 없다. 전체적으론 상거래 질서도 쾌적하다. 봉건시대 사무라이는 납품 받은 물건에 하자가 많으면 일종의 사기죄로 업자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고 한다. 납품업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물건을 만들었는데, 대신 봉건 영주는 물건 값이라면 부르는 대로 치렀다고 들었다. 흥정을 체면 깎이는 일로 여겨서다. 그런 전통이 조금쯤 남아 있다는 것이다.
 

‘왜’를 잃어버린 선거법, 공수처법
일본식 포퓰리즘 정치로도 모자라
중국 황제 정치 넘보는 것 아닌가

한국을 찾는 중국 사람들이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친절한 데 놀란다는 답변이다. 베이징에도 수두룩한, 똑같은 브랜드 물건을 한 보따리 싸들고 귀국하는 건 ‘중국 매장’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때 그랬다.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이런 인상들 때문인지 한·중·일 3국이 시차를 두고 같은 길을 따라간다는 주장과 연구가 많다. 미쯔비시 종합연구소는 30년 남짓이란 계산까지 내놨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대한 논란도 맥락이 어슷비슷하다. 아시아 전체가 일본 모델을 따랐으니 성장 궤적이 비슷할 거란 전제가 출발점이다. 물론 반론이 있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일본은 당시 대략 10년 남짓에 15번이나 총리가 바뀌었다. 툭하면 의회 해산이고 선거만 치르면 포퓰리즘 공약이 불을 뿜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와는 영 반대 쪽이었다. 또 있다. 우린 미국 박사들의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다. 미국식 사고와 결정 방식은 일본식 부침과 짝이 아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닌 것 만도 아닌 것 같다. 당장 포퓰리즘 퍼주기가 그때 일본 정치 뺨친다. 당장 정부의 돈 뿌리는 솜씨가 조자룡 헌창 쓰는 수준이다. 현금 복지만 50조원을 넘나드는데 내년엔 전체 가구 절반이 나랏돈 지원으로 생활한다. 생색은 정부가 내지만 나라 빚이고 납세자 몫이다. 막고 나서야 할 국회는 더 최악의 식물국회 기록을 만드느라 팔짱을 꼈다. 한쪽은 정치 불안이 정부 실패를 불렀다. 다른 쪽은 정부 실패가 정치 불안을 키운다. 순서만 다를 뿐 데자뷔다.
 
지금 일본은 다르다. ‘그때 잘못에서 배웠다’는 아베 2차 내각은 침체를 걷어내는 중이다. 하지만 우린 일본이 허우적대던 정치에 더 튼튼한 옹벽을 쌓고 있다. 새 선거법으론 지금 구조를 선거로 부수는 게 더 어려워질 판이다. 선거에 지든 이기든 과반 여권을 만들겠다는 게 바꾸려는 쪽 생각이다. 사표 방지란 구호는 숫제 사라졌다. 이리 찢고 저리 붙인 누더기에 난수표여서 웬만한 유권자는 왜, 뭘 바꾸겠다는 건지 두세 번 들어도 알 수가 없다. 야당은 신경도 안 쓴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한 경기 규칙을, 대놓고 자기들끼리 밀어붙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더 황당하고 기막힌 건 선거법이 마무리되는 즉시 달려갈 공수처법이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겠다고 시작하더니 똑같이 산으로 갔다. 대통령 가족과 측근을 수사한다는 공수처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수사관엔 초록이 동색인 분들을 대거 임명할 수 있도록 큰 길을 냈다. 정권 비리수사는 커녕 대통령 공수부대가 되기 십상이다. 분권형 대통령과는 물론 궁합이 안 맞는다. 제왕적을 넘어 황제적 대통령에게나 필요한 기구다. 실제로 시진핑 황제에겐 무소불위 감찰위원회가 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중국이다. 우린 다르다. 예의와 염치가 우선이다. 서양의 젠틀맨십과 양상이 다를 뿐 양반의 나라다. 국민은 그렇다. 그런데 정치는 아니다. 전직 국회의장은 행정부 수장 밑으로 가느라, 집권당 대표를 지낸 분은 장관 자리에 체통을 버렸다. 국회는 자리 보전용 누더기 공사로 바쁜 크리스마스다. 경제는 죽을 쑤던 일본 닮아가고 해결해야 할 정치는 중국을 바라본다.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우린 정말 괜찮나. 이렇게 동서로 막가도 되는 건가.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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