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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성탄절에 만난 음악의 챔피언

중앙일보 2019.12.26 00:15 종합 27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무대를 비추는 모든 불이 꺼졌다. 연주장 전체가 어두움에 쌓였다. 출입을 알리는 비상구 불빛만 희미하다. 그리고 음악이 흐른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대부로 꼽히는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망각’이다. 관객들도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잔잔하면서도 때론 폭발적인,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선율에 몸을 맡겼다. 바이올린·클라리넷·트럼본·팀파니·피아노 등이 어울리며 올 한 해를 힘겹게 버텨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했다.
 

세계 유일 시각장애악단
하트체임버의 멋진 화음
해마다 40차례 전국 돌아
함께하는 세상 일깨워줘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이하 하트체임버)의 성탄절 축하 무대다. 올해 창단 12년을 맞은 세계 유일의 시각장애인 관현악단이다. 연주가 끝나자 다시 불이 켜졌다. 이상재 음악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을 즐기셨나요.”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브라보” “잘한다”도 빠지지 않았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됐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세상의 불화도 가라앉히는 음악의 힘이다.
 
암전(暗轉) 공연은 하트체임버의 얼굴과 같다. 여느 연주장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런데 100% 암흑은 아니다. 무대와 연주자의 경계가 희미할 뿐이다. 사물의 형체는 분간할 수 있다. 그것도 어쩌면 눈이 온전한 사람들의 축복일지 모른다. 시각장애인에겐 사정이 다를 수 있다. 이 감독에게 암전 무대를 기획한 취지를 물었다. “시각장애인이 이런 느낌으로 살아가겠구나, 짧게나마 그런 시간을 공유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가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제16회 정기연주회를 하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각장애인 관현악단이다. [공연 영상 캡처]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가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제16회 정기연주회를 하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각장애인 관현악단이다. [공연 영상 캡처]

하트체임버는 총 21명으로 구성됐다. 중증 시각장애인 13명과 비장애인 8명이 함께한다. 시각장애인 모두 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실력파다. 때문에 공연 자체의 만족도가 높다. 장애인 관현악단이라고 소위 ‘동정표’를 던질 이유가 없다. 일반인 오케스트라 무대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만한 기량을 닦을 때까지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겠지만 말이다.
 
이날 공연은 두 시간가량 펼쳐졌다.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을 시작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같은 정통 클래식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알라딘’ 주제가 등 영화음악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다.
 
특히 마지막 연주에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1000만 가까운 관객을 불러들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시 만난 듯했다. 록그룹 퀸이 열창한 ‘위 윌 록 유’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보헤미안 랩소디’ ‘위 아 더 챔피언’ 네 곡이 콘서트홀 600좌석을 가득 채웠다. 1986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달군 퀸의 전설적 무대가 부럽지 않았다.
 
클라리넷 연주자인 이상재 음악감독. 천안 나사렛대 교수로 있다.

클라리넷 연주자인 이상재 음악감독. 천안 나사렛대 교수로 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이날 가장 빛난 건 단원들 사이의 인화다. 공연 시작과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이른바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손을 잡고, 그 장애인의 손을 다른 장애인이 잡고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무대 왼쪽 맨 뒤에 있는 피아노석까지는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함께했다. 공연을 이끄는 지휘자도 없었다. 이상재 감독의 ‘하나 둘 셋’ 구호와 무대 바닥을 치는 구두소리에 맞춰 연주가 시작했다. 단원들은 악보를 놓는 보면대(譜面臺)도 없이 모든 음악을 암기해 연주했다. 그런 장면 장면 자체가 앙상블을 이루며 세상에 하나뿐인 교향곡을 빚어냈다.
 
이 감독에 따르면 단원들이 외운 레퍼토리가 200여 곡에 이른다. “매주 토요일 서울 서초동 연습실에 모여 4~5시간씩 화음을 맞춘다”고 했다. 설·추석이 낀 주일을 빼고 1년 50주 한데 모인다. 그뿐만 아니다. 서울과 지방, 파트별로 주 3회 연습하고, 주말에 전체가 만나 음을 조율한다. 음악에 죽고 음악에 사는 셈이다. 엄청난 열정이다. 학교·교정시설·노숙인쉼터·경찰서·소방서 등을 돌며 매년 40회 남짓 무대에 선다. 대단한 지구력이다. 2011년, 2015년 두 차례 뉴욕 카네기홀 초청 공연도 했다.
 
하트체임버는 이날 앙코르곡으로 김현철의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을 들려주었다. 기자가 받은 올 최고의 성탄절 선물이었다. 2017년에 이어 내년 4월 미국 미시간 국제음악제에 참가한다 하니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발걸음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연주를 합니다. 가장 큰 목표는 음악으로 밥을 먹는 직업 재활악단입니다”라는 이 감독의 각오가 가슴을 후빈다. 하트체임버의 오늘이 미완성일 수 있어도 그들은 이미 챔피언임이 분명하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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