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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못 갔다" 아버지의 변비 원인은 외로움이었다

중앙일보 2019.12.25 15:00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0) 

 
집에 도착해 가방 내려놓기 무섭게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오늘도 화장실 못 갔다!”

 
반사적으로 가스대를 본다. 밥도 국도 그대로다. 사흘째 점심을 안 드셨다. 궁금할 때 드시라고 꺼내놓은 간식도 손도 안 대셨다. 이런 일 처음이다. 입맛 없다고 적게 드실 때는 있었지만, 아예 굶는 경우는 없었다. 왜 안 드셨느냐 물으니 배가 안 고파서 안 드셨다 한다. 며칠째 변을 못 보셔서 속이 답답하니 입맛이 없으신 듯했다.

 
아버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는 편이다. 5시면 일어나시고 10시 전에 주무신다. 매일 본인이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 맨손체조를 빠짐없이 하시고 식사도 배변도 규칙적인 편이다. 그런 아버지가 요즘 늦잠도 간혹 주무시고 밥도 거르시는 거다. 가장 큰 변화는 사흘 이상 변을 못 보신 것. 보통 때는 물이나 효소를 평소보다 좀 더 드시게 하거나 누운 자세에서 시계방향으로 배를 쓸어주는 마사지를 20분가량 해 드리면, 화장실을 시원하게 다녀오시곤 했는데 이번엔 좀 오래 간다.
 
식사도 배변도 규칙적인 편인 아버지가 며칠째 변을 못 보셔서 속이 답답하니 입맛이 없으신 듯했다. [사진 pixabay]

식사도 배변도 규칙적인 편인 아버지가 며칠째 변을 못 보셔서 속이 답답하니 입맛이 없으신 듯했다. [사진 pixabay]

 
얼른 갈치 한 도막 굽고 미역국 데워 밥을 차린다. 외숙모가 담아주신 김장김치에 반찬 몇 가지 꺼내 놓으니 숟가락을 드신다. 
“아빠, 미역국 드시면 미끈거리며 쑥 나올 거예요. 겨울철이라 집에 주로 계시니 아무래도 활동량이 적어서 그래요. 입맛이 없어도 자꾸 먹어서 밀어내기라도 해야 돼요. 점심 거르시면 안 돼요.”

“밀어내기? 네 이론도 참고할 만하다. 배가 아픈 것은 아닌데, 영 기분이 찜찜하고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아빠, 저도 사실 사흘째 안 갔고요, 언니는 다이어트 할 때 두 달 동안도 못 간 적 있었는데, 그 자체로는 아무 일 없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따뜻한 밥숟가락 위에 하얀 갈치 살을 올려드리니 곧잘 입에 넣으신다. 한 공기 다 비우셨다. 불안해하는 아버지 다독이느라 저녁 먹는 내내 남들이 들으면 민망한 ‘변’ 이야기만 했다. 식사 마치고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담배 피우러 나가시려던 아버지가 발걸음을 돌려 화장실로 향하신다.
 
“나 10분 동안 찾지 마라.”
혹여 방해될까 봐 숨도 못 쉬고 성공(?)을 기원하며 기다리길 잠시, 코끝으로 승리의 향기가 밀려왔다.
“아빠, 문 닫고 천천히 다 보셔요.” 하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자랑하려고 그런다!”
말씀에 웃음이 묻어 있다.
 
이렇게 약 일주일에 걸친 변비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분(?)이 다녀가시고 나니, 잊었던 염려가 밀려왔다. 둘째 언니에게 조언을 구했다.
“언니, 아빠가 자꾸 점심을 거르셔서 걱정이야”
"아버지가 약간 우울증이 온 게 아닐까?”
 
사회복지학 교수인 언니는 역시 전문적 관점에서 판단한다. 소화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고, 딸들이랑 먹을 때는 잘 드시는 데 혼자 있을 때 안 드시는 것은 심리적인 이유라는 것.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져 가뜩이나 침울한 요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어머니와의 추억에 더 깊이 잠기시는 듯하다. [사진 pixabayl]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져 가뜩이나 침울한 요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어머니와의 추억에 더 깊이 잠기시는 듯하다. [사진 pixabayl]

 
그러고 보니 12월 중순이다. 연말이 되면 조금씩 쓸쓸함을 느끼지만, 아버지는 유독 심하다. 크리스천으로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크리스마스는 매우 기쁘고 행복한 때인데, 아버지에겐 가장 우울한 때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두 분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첫날 밤에는 하얀 눈이 쏟아지는 축복도 받으셨단다. 내색은 안 하시지만 이맘때만 되면 급속히 어두워지시는 것을 경험한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사라져 가뜩이나 침울한 요즘이기에,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어머니와의 추억에 더 깊이 잠기시는 듯하다.
 
부모님은 196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사진 푸르미]

부모님은 196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사진 푸르미]

 
영화 ‘파비안느의 진실’ 속에서 주인공은 “천국에 갔을 때 당신은 신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나에게 든 생각은 “그 전에, 엄마부터 만나고 싶어요”였다. 나 역시 크리스천으로서 늘 천국을 소망하지만, 그 소망 속에는 보고 싶은 엄마를 천국에서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딸인 내가 그러한데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랴.
 
아버지는 연애시절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때 “오, 나의 비너스여!”라는 닭살 돋는 호칭으로 시작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다 모아두셨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 우리는 그것을 함께 읽으며 울었다.)
 
미와 모성애의 상징이라는 ‘비너스’, 희디흰 어머니의 피부에 눈이 먼 아버지는 목숨을 건 구애 작전을 펼쳤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에 골인, 딸을 넷이나 낳고 모성애의 진수를 발휘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 엄마, 아빠가 엄마 보고 싶어 변비에 걸린 걸 알고 계실까? 아니, 보고 계시겠지?
 
추신: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던 변비는 일주일 뒤 또다시 이어졌다. 내과에 갔더니 연세 많으신 분들은 오랫동안 화장실에 못 가실 경우 약한 곳으로 2차 염증이 이어질 수 있다고 하시며 3~4일 기다려 보고 바로 관장하는 것이 낫다 말씀 주셨다. 다음 날 저녁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피검사와 복부 엑스레이, 복부 CT 촬영 후 관장까지 마치고 귀가했다. 젊은 사람의 경험을 가지고 노인의 증상을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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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푸르미 공무원 필진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 아버지와 10년째 동거 중인 20년 차 공무원. 26년간 암 투병 끝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다. 팔순을 넘어서며 체력과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아버지를 보며 ‘이 평화로운 동거가 언젠가 깨지겠지’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 마음은 감춘 채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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