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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비 주니 자선 냄비에 쏘옥…내 손자, 언제 이렇게 컸노

중앙일보 2019.12.2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0)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걸 알려 주는 것은 구세군 냄비다. 올해도 마트 앞에, 정류장 앞에, 빨간 옷을 입고 종을 치는 구세군 사람들. 추운 날씨에 봉사하는 그분들이 존경스럽다.
 
딸아이네 아이들을 봐주기로 한 날이면 내가 잘 가는 곳은 대형마트다. 아이 셋을 카트에 구겨넣고 마트를 돌아다닌다. 굳이 살 것도 없는 마트를 몇 바퀴째 빙빙 돌다 보면 아이들은 신이 나서 좋아했다. 아이 셋을 느긋이 봐줄 수 있는 곳은 마트뿐이다. 마트에서는 내가 진상 고객일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마트나 정류장 앞에서 빨간 옷을 입고 종을 치는 구세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진 송미옥]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마트나 정류장 앞에서 빨간 옷을 입고 종을 치는 구세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진 송미옥]

 
그리고 그곳엔 아이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게임기가 있다. 똑똑한 녀석들은 할머니랑 오면 으레 거기에 달려가서 제자리인양 앉는다. 오락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돈을 넣고 두드리며 신나 한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천 원씩을 꺼내 나눠주고 편안하게 옆에 앉아서 쉰다. 작년 이맘때의 12월에도 게임기가 있는 바로 옆에 구세군 냄비가 들어섰다. 제법 커서 말귀를 알아들을 아이 셋을 세워놓고 양손에 천 원씩 들고 흔들며 물었다.
 
“자, 이 돈을 게임 안 하고 여기 냄비에 넣으면 종 치는 아저씨가 모아서 아픈 동생들 도와주러 가실 거야. 너희들 게임할래? 아픈 동생들 도와….”
“게임할 거예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잽싸게 돈을 낚아채 게임기로 달려간다. 말 못하는 막내도 덩달아 형들을 쫓아가서 게임기 한 대를 차지하고 앉는다.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교육한답시고 우이독경 하듯 혼자서 중얼중얼 떠들었다. 천방지축인 녀석이 셋이나 되다 보니, 웬만하면 조용히 놀게 해 주는 것도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지혜다. 자선냄비의 종소리만 길게 울려 퍼지던 날이었다.
 
 
올해도 부쩍 커버린 아이 세 녀석을 마트에 데리고 가, 한 놈만 카트에 태우고 장을 봤다. “얌전하게 있어야 돼.” 그리곤 여느 때와 같이 게임기 앞으로 가서 각기 천 원씩을 쥐여 줬는데, 한쪽에 빨간 옷을 입고 종을 치며 구세군 냄비를 지키는 어른을 보며 망설인다. 여덟 살 첫째가 천원을 들고 게임기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할머니, 이거 게임 안 하고 저기 냄비에 넣을래요. 선생님이 냄비에 든 돈을 모아 아픈 친구들을 도울 수 있댔어요.”
‘해마다 나도 똑같은 말을 했단다. 이 녀석아. 하하.’
 
어느새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 게임기 앞에 앉았던 동생들도 영문을 모르고 첫째를 따라 손에 들고 있던 돈을 오락하듯 냄비에 넣고 깔깔 웃는다. 그러나 곧 동생들은 큰 녀석을 따라 했다가 게임을 못하게 된 걸 알고는 울먹울먹 입을 삐죽거린다.
“할머니, 우리가 착한 일을 했으니 천 원씩 더 주세요.”
 
게임을 더 좋아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

게임을 더 좋아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

 
흥정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다시 천원을 뺏겨 아이들은 오락하고 나는 잠시 휴식시간이 된다. 첫 손주가 생기면서 너무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아이의 생일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기부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결혼한 아들과 딸이 경쟁하듯 한해 걸러 또, 또, 또, 그렇게 다섯이나 생기고 보니 정신도 없어서 기부하고자 했던 마음을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 말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망각의 시간은 잘도 넘어갔다. 감사와 행복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다 의미 있는 날인데 말이다.
 
올해도 온 가족이 별 사고 없이 크게 아프지 않고, 안 좋은 뉴스 없이 잘 지내 온 한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있는 저 냄비에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지갑에 있던 지폐를 모두 꺼내(금액은 얼마 안 되지만) 아이들에게 기부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자기가 넣은 횟수만큼 아픈 친구들이 치료를 받고 안 아프게 살 수 있다며 으쓱한다. 아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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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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