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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크리스마스 아침 단상

중앙일보 2019.12.25 00:27 종합 24면 지면보기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크리스마스에 대해 나는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소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에 나오는 공산주의자 빼뽀네 읍장과 견해가 같다. 성탄(聖誕)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세상을 구할 운명을 지닌 아이가 왕이나 장군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설정이 그렇다. 그것도 핍박받는 민족 출신으로, 마구간에서.
 

예수가 지금 우리 앞에 온다면
세상 아닌 우리의 변화 촉구할 것
대접받으려면 먼저 대접하라는…

구세주는 예언대로 자기 민족을, 아니 인류 전체를 구원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 일을 해낸다. 엄청나게 감동적일 뿐 아니라 굉장히 지적인 이야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구세주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뒤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그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나사렛 예수 이야기가 문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는 순간, 목이 턱 막히고 만다. 우선 그리스도가 제시한 길이 불가능해 보여서 그렇다.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다른 많은 가르침도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다.
 
신자들 역시 그래 보인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했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걸 실천하는 교인이 몇이나 되는가. 나는 그들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복음서의 명령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기독교 신학을 삼키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계획이라는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워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견습 수도사인 동생 알료샤에게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을 거론하며 묻는다. “왜 아이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니? 그런 게 신의 뜻이라면 나는 정중하게 그에게 입장권을 돌려주련다.”
 
원죄나 최후의 심판 같은 교리는 이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아이들이 죽도록 학대당한 마당에 지옥이 뭘 바로잡아줄 수 있다는 건데?”
 
당대 유대인들 역시 서로 다른 이유로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열심 당원들은 메시아가 로마를 쳐부수고 유대 민족의 독립 국가를 건설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는 외부를 향한 폭력 투쟁이 아니라 내면의 도덕적 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마리아인, 심지어 로마인에게까지 열려 있었다.
 
예수가 주장한 도덕적 각성은 지식인층의 심기도 건드렸다. 그들이 옹호하는 기존 질서와 아주 배치되는 건 아닌데, 뾰족한 가시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불륜을 저지른 여인을 옛 율법대로 투석형에 처하느냐 마느냐 같은. 예수는 매번 경쾌하게 함정을 빠져나갔고 그럴수록 기득권 지식인들은 더 분개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보기에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혁명적이지 않아서 고발당했다. 그는 로마가 아니라 동족의 미움을 샀다. 정작 로마에서 온 총독은 고발을 접수하고 ‘별문제 없는 거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신학이 아니라 문학으로서 신약을 읽으면 구세주를 보다 부담 없는 캐릭터로, 사고실험의 대상으로 다뤄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예컨대 예수가 지금 한국에 와서 사회운동을 벌인다면 뭐라고 할까 같은 상상. 아마 그는 여러 정치세력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약자의 편이었던 그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청년구직자, 빈곤 노인, 여성, 성 소수자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친일수구냉전세력 척결’ 같은 말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변화를 촉구할 것이다. 성장률 몇 퍼센트와 같은 약속을 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칠 것이다. 슬퍼하는 이가 복이 있다며, 그저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며. 우리가 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테니 남 비판하지 말고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며. 그러면 우리는 다시 격분하리라. 개혁 대상은 늘 내가 아니라 남이어야 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와 달콤한 캐럴과 아기 예수 인형에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다. 그리하여 성탄절 아침에는 일개 세속주의자도, 우리가 산상수훈의 한 구절 정도는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냘픈 희망을 품는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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