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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액 적어 미안해요" 어김없이 성탄절 전날 온 키다리 아저씨

중앙일보 2019.12.24 15:51
23일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60대 익명 기부자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2300여만원과 메모. 메모에는 '금액이 적어서 미안합니다. 나누다 보니 그래요'라고 적혀 있다.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23일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60대 익명 기부자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2300여만원과 메모. 메모에는 '금액이 적어서 미안합니다. 나누다 보니 그래요'라고 적혀 있다. [사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23일 오후 7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대구모금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했는교? 시간 되면 잠깐 만납시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매년 이맘때마다 들을 수 있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2012년 1억원 기부로 나눔 시작한 60대 남성
올해 2300여만원 전달…누적 9억8000여만원

약속 시간을 정하고 대구모금회 직원이 대구 수성구 황금동 한 제과점을 찾아가 보니 노부부가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매년 12월이면 익명으로 대구모금회에 거액의 기부금을 전하는 60대 남성과 그의 부인이었다. 남몰래 묵묵히 나눔을 이어간다고 해서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린다.
 
키다리 아저씨는 대뜸 봉투부터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금액이 적어서 미안합니다. 나누다 보니 그래요’라고 적힌 메모 한장과 2300여만원 상당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는 먼저 가족 이름으로 1억원을 기부해 금액이 줄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는 경기가 무척 어려워 기부가 쉽지 않았지만 올해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달 1000만원씩 12개월을 적금, 이자까지 기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키다리 아저씨가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도 계속 기부를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그는 “부친을 일찍 여의고 19세에 가장이 돼 가족들을 먹여 살리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애환을 잘 알게 됐다”며 “모든 사람이 보내주는 소중한 성금을 꼭 필요한 이웃들에게 잘 전달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함께한 키다리 아저씨의 부인도 “승용차도 10년 이상 타고, 적은 돈일지라도 우리 부부가 쓰고 싶은데 쓰지 않고 소중하게 모았다”며 “아직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나눔의 즐거움에는 비교할 수 없다”고 전했다.
20일 오후 대구 동성로 야외무대에서 열린 '희망 2020 나눔캠페인' 출범식에 참석한 내빈과 맑은소리소년소녀합창단이 1억원이 모일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사랑의 온도탑' 제막을 축하하고 있다. [뉴스1]

20일 오후 대구 동성로 야외무대에서 열린 '희망 2020 나눔캠페인' 출범식에 참석한 내빈과 맑은소리소년소녀합창단이 1억원이 모일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사랑의 온도탑' 제막을 축하하고 있다. [뉴스1]

 
키다리 아저씨의 자녀들 또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자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기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자녀들은 언론에 보도된 키다리 아저씨의 메모 필체를 보고 아버지임을 한 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대구는 나눔의 저력이 있는 도시다”며 “언론을 통해 나눔이 이어지는 모습들을 보며 성숙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24일 대구모금회에 따르면, 키다리 아저씨는 2012년 1월 처음 대구모금회를 방문해 익명으로 1억원을 전달하며 나눔을 시작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사무실 근처 국밥집에서 1억2300여만원을, 2013년 12월엔 사무실 근처로 직원을 불러내 1억2400여만원을 건넸다.
 
또 2014년 12월엔 1억2천500여만원, 2015년 12월 1억2000여만원. 2016년 12월 1억2000여만원, 2017년 12월과 2018년 12월에도 각각 1억2000여만원을 전달했다. 이렇게 키다리 아저씨가 2012년부터 8년 동안 9회에 걸쳐 기탁한 성금은 9억8000여만원에 이른다. 이는 대구모금회의 역대 누적 개인 기부액 중 가장 많은 액수다.
 
이희정 대구모금회 사무처장은 “올해도 잊지 않고 거액의 성금을 기부해 주신 키다리 아저씨에게 대구의 소외된 이웃을 대표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기부자님의 뜻에 따라 소중한 성금을 대구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여 나눔으로 더 따뜻한 대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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