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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북의 ‘쿠바식 생존술’ 방치 안 된다

중앙일보 2019.12.24 00:31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하루 19억 잔이 팔리는 자본주의의 상징, 코카콜라가 못 뚫은 두 나라가 있다. 북한과 쿠바다. 둘 다 급격한 변화를 거부해온 교조주의적 공산국가다. 그래선지 두 나라는 1960년 김일성과 피델 카스트로가 맺은 ‘형제 관계’를 꾸준히 이어왔다. 불쑥 쿠바를 꺼낸 건 이 카리브 해의 소국이 북한의 ‘새로운 길’과 관련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연말까지 제재가 안 풀리면 ‘새로운 길’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거듭된 해제 요구에도 꿈쩍 않는 미국인지라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도 됐다.
 

관광 수입으로 외화벌이 도모할 듯
김정은, 올 유독 관광지 자주 방문
돈줄 차단해야 경제제재 효과 있어

그렇다면 ‘새로운 길’이 뭘까. 인공위성을 쏘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하던, 어떻게든 북한이 도발할 거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미사일을 뜯어먹고 살 수는 없는 법. 경제 제재에 신음하는 북한은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감지되는 게 북한의 ‘쿠바 모델’ 따라 하기다. 냉전 시절, 소련 원조로 버텨온 쿠바는 1989년 동구 공산권 몰락으로 지원이 끊기자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길고양이까지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1990년대 쿠바는 관광에 집중 투자해 살길을 찾았다. 지금은 해외 거주 쿠바인들의 송금과 함께 관광산업이 최대의 외화벌이 수단(한해 30억 달러)으로 성장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북한이 ‘쿠바 모델’을 따라 하려는 건 어쩜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김정은도 올해 유독 관광지를 자주 찾았다. 온천휴양지로 개발 중인 평안남도 양덕에는 네 번, 관광지구로 지정된 백두산 입구 삼지연에도 세 번이나 갔다. 지난 10월 금강산에 가 남측 시설에 대해 “너절하니 싹 들어내고 새롭게 건설하라”고 한 것도 그저 남쪽을 향한 몽니로 이해할 게 아니다. 실제로 관광산업을 키우기 위한 지시였을 공산이 크다.
 
북한이 쿠바를 벤치마킹한다는 증거는 또 있다. 지난 6일 발표된 ‘조선의료관광교류사’ 발족이다. 북한은 관절염·피부병 등의 치료 차 찾아오는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온천휴양지를 개발하고 이 기구를 출범시켰다. 쿠바가 풍부한 의료진을 앞세워 핵심적인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아온 분야가 다름 아닌 의료관광이다.
 
관광을 키우려는 김정은 정권의 움직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북한은 최근 몇 년간 관광에 집중투자해 이미 그 덕을 보고 있다. 유엔 대북 제재로 수출이 막힌 북한은 올 10월까지 대중 누적 적자만 19억 달러를 기록했다. 제재 이전 북한의 전체 수출액이 30억 달러 안팎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적자다.
 
그럼에도 북한의 최근 환율은 안정세이며 기름값 역시 크게 오른 기색이 없다. 왜일까. 적게는 2억5000만 달러, 많게는 10억 달러에 이르는 중국인 관광 및 해외노동자 수입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올해 북한에 온 중국 관광객은 35만 명. 이들이 북한에서 뿌린 돈이 김정은 정권의 숨통을 터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난 6월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지금의 5~6배인 200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보도도 있다. 이게 맞는다면 국제 사회가 아무리 경제 제재로 조여도 북한은 관광수입만으로 거뜬히 버틸 수 있다.
 
그러니 대북 압박정책이 효과를 내게 하려면 새로운 생명줄인 관광 수입까지 끊어야 한다. 전례도 있다. 1980년대, 남아공 인종차별이 문제가 되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 나라에 드나드는 항공편 모두를 금지했다. 관광, 특히 유럽 관광객으로 먹고 살아온 남아공으로서는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아공 백인 정부가 백기를 든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대북 제재가 힘을 쓰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 유엔 제재 대상에서 빠진 개별 관광도 막아야 한다. 지금처럼 숭숭 뚫린 제재로는 북한의 핵 위협 속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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