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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열두발자국] 과학자의 12월 보내기

중앙일보 2019.12.24 00:29 종합 28면 지면보기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12월이 되면 과학자들도 바쁘다. 매년 1만명이 넘는 박사 인력이 전국에서 배출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11,12월에 박사 논문 심사를 받는다. 석사 학위 논문심사까지 하면 그 수는 3배에 이른다. 그들의 논문을 읽고 심사하는데 12월이 온전히 필요하다.
 

채점·논문심사로 분주한 연말
짬을 내 서점 찾는 것도 큰 즐거움
우주속 삶 깨닫게 할 선물될 수도

학기 말이라 기말고사 출제와 채점, 그리고 성적 매기기 또한 기다리고 있다. 해가 갈수록 출제 형식이 진화되어 점점 질문은 짧아지고 답안은 길어지고 있어, 채점하는데 점점 많은 시간이 걸린다. 채점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 해가 저무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 연구과제를 수행 중이라면 결과보고서도 제출해야 하고, 인센티브와 내년 연봉제 평가를 위한 행정서류도 제출해야 한다. 연봉은 좋지만, 평가 서류는 늘 귀찮은 일이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 짬을 내어 미뤄둔 논문 제출도 서두른다. “논문은 언제 저널에 제출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연구자들이라면 가장 궁금한 질문 중 하나일 텐데, 저널 편집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5월, 8월, 12월이 한결같이 제일 바쁘다고 답한다. 논문 투고가 가장 몰리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11월 추수감사절도 빼놓을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논문 투고는 몰리는데, 8월 휴가 기간 만큼이나 논문의 심사위원들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계획에 겨우 맞춰 12월 하순에 논문을 완성하고 저널에 제출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전략은 아니라는 얘기인데,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야 논문을 마무리할 시간이 나는 것 또한 과학자들의 삶인 걸 어떡하나!
 
이맘때가 되면 읽으려고 사두었다가 아직 손을 못 댄 과학책들을 몰아서 읽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과학책 판매량은 50%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매년 이 온라인 서점에서만 과학책이 40만권 넘게 팔린다고 하고, 그중 40대가 가장 많다고 하는데, 그 중 한명은 나일 게다. 과학책과 기술서적이 매년 1000종 가까이 출간되는데, 그중 10~20권 정도는 보석 같은 책들이다. 나만의 ‘올해의 과학책’을 선정해 보는 것도 12월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물론 과학자라고 해서 과학책만 읽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로마 아그라왈이 쓴『빌트』와 웬디 우드가 쓴 『해빗』이 놓여 있다. 올해의 과학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런 책들을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것만큼 행복한 시간도 없다. 덧붙여, 세계적인 작가 세스 노터봄의 『유목민 호텔』은 여행문학이 이렇게 수준 높은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연말을 함께 보낼 책을 사러 서점을 방문해 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이리라. 책들 사이를 걸으며 인쇄된 책 냄새를 맡는 것도 즐겁고, 크리스마스 카드 매대에서 친구들을 위한 카드를 사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리라. 아마 10~20년쯤 지나면, 전자책과 전자 카드가 세상을 지배할지도 모르니, 그 전까지 열심히 아날로그의 즐거움을 만끽해보는 것도 연말을 의미 있게 보내는 전략이리라.   크리스마스 기분이 들게 하려면, 캐럴도 들어주어야 하고 크리스마스 영화도 몇 편 봐주어야 한다. 요즘은 확실히 도시 곳곳에 크리스마스 기분을 들게 만드는 곳들이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지만, 그래도 기분을 만끽하는 방법들이 있다. 우선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서는 헨델의 메시아 같은 종교음악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계속 들려준다. 재즈로 편곡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려주기도 해서, 혼자 조용히 연말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라면 봐주어야 할 로맨틱 코미디들도 여럿 있지만, SF영화 보기도 빼놓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행사 중 하나다. 미국인들이라면 ‘스타워즈’ 시리즈 보기가 매년 이맘때 반드시 치러야 할 의식 같은 것이리라. 특히 올해는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를 마무리 지을 3부작의 최종편이자, 1977년 첫 ‘스타워즈’ 개봉 후 42년 동안 이어진 스카이 워커의 삶에 대한 9부작의 종지부를 찍는 작품이 개봉돼, 더없이 감격적인 크리스마스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걸 못 본다면, ‘스타워즈’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인 ‘애드 아스트라’와 ‘조커’를 보는 것도 크리스마스를 유익하게 보내는 법이리라. 한 해가 간다는 것 또한 그저 시간의 흐름일 뿐이지만, 이 우주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의 삶을 깨닫는 것 또한 연말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고, 꽃길이기만 하였으면 바라는 다음 해가 온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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