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너무 막 나간 하명 수사의 결말

중앙일보 2019.12.24 00:27 종합 27면 지면보기
조강수 사회에디터

조강수 사회에디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공정한 경쟁이 요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황운하는 피라미드의 밑바닥
선거 부정의 실체 규명돼야
수사팀 교체, 꿈도 꾸지 말길

“형사 법 집행을 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하는 가치는 바로 공정한 경쟁질서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공정한 경쟁이야말로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정의다. (중략) 공정한 경쟁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에 대해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지난 7월 취임사 중에서)
 
윤 총장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수사로 대응해야 하는 범죄의 1순위로 ‘권력기관의 정치·선거 개입’을 꼽았다. 국민의 정치적 선택과 정치활동의 자유가 권력과 자본의 개입 때문에 방해받지 않아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대목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으로서의 체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또 청와대·여권과 대립각을 세워 집중포화를 맞으면서도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수사를 밀어붙이는 이유도 담겨 있다.
 
과거 독재정권의 단골 메뉴처럼 여겨졌던 선거 부정은 민주화 이후 교묘하고 세련된 형태로 진화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자로 배출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일주일 전에 터진 ‘선거 댓글 여론 조작 사건’의 주범은 놀랍게도 국가정보원이었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 보수 인사를 최고 정보기관 수장에 임명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인사 실패 책임도 크다.
 
서소문 포럼 12/24

서소문 포럼 12/24

선거판에서 진보라고 ‘깨끗한 손’은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한 2017년 5월 대선을 앞두고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연루된 ‘드루킹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드루킹 사건 항소심이 진행 중인 와중에 또 다시 선거 부정 사건이 터졌으니 악재다. 야당에선 “대통령과 청와대가 기획·실행한 조직적 선거 공작”이라고 공격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통상 수사기관은 선거를 앞두고 개인 비리 수사는 잘 안 한다. 선거결과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낙점한 김태정 검찰총장이 그해 대선을 두달여 앞두고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의 유보를 전격 결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당시 ‘수사를 하면 전라도에서 민란이 날 것’이라는 격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20여년 전에도 그랬는데 2018년 황운하 당시 울산지방경찰청장은 거꾸로 갔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기현 울산시장의 비리가 아닌, 형제와 측근 비리임에도 강제 수사에 착수했다. 대대적 압수수색 날이 김 시장의 자유한국당 후보 공천 확정 발표일(3월 16일)이었던 건 더 충격이었다. 워낙 이례적이라서 당시 상황이 기억에 박혀 있을 정도다. “어쩌다가 저런 일이? 나중에 큰 화가 되겠다”라고 개탄 겸 걱정을 했지만 수사 지휘자가 황운하라기에 일견 이해는 갔다. 경찰대 1기 출신인 그는 경찰에선 검경 수사권 조정 투쟁의 상징으로 통한다. 줄곧 검찰과 각을 세웠다. 검사 비리를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멀쩡한 것은 자신과 주변 정리를 깨끗이 했기 때문이라는 평이 많았다. 얼마나 확신에 찼으면 그랬겠나 싶었다. 하지만 지나친 과신과 무모함이 화를 불렀다. 김기현은 낙선했고 경찰 사건들은 전부 검찰 단계에서 무혐의로 끝나면서 부메랑이 됐다.
 
애초 하명(下命) 수사에서 시작된 검찰 수사는 ‘제2의 안종범 수첩’으로 불리는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업무 일지가 검찰에 확보되면서 후보 매수, 선거 공약 개입 쪽으로 확대됐다.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 업무 일지에는 ‘대통령, VIP, 비서실장, 민정수석, BH회의’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불출마 조건으로 오사카·고베 총영사 자리를 놓고 흥정하는 과정은 신기하게도 드루킹 사건과 시기·방식이 유사하다.
 
‘30년 지기인 송철호의 울산시장 당선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청와대 참모들과 장관들이 움직인 것이라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중대 범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표결로 몰고 간 것도 선거법 위반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미애 신임 법무부 장관이 취임 직후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겨눈 수사팀 교체를 추진한다면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어쩌면 황운하도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서 상부의 지시를 너무 충실하게(?) 이행하다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갑충이 되어버린 주인공 그레고리의 처지와 비슷할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조강수 사회에디터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