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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가와이’를 거부한 이토 시오리

중앙일보 2019.12.24 00:13 종합 28면 지면보기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어린이집 학예발표회 무대에 등장한 딸의 모습에 나와 남편은 적잖이 놀랐다. 딸은 어깨를 드러낸 핑크 드레스에 플라스틱 은색 왕관을 쓰고 있었다. 프린세스 노래에 맞춰 다소곳한 손동작으로 공주 춤을 췄다. 학부모들은 연신 “가와이(かわいい, 귀엽다)”라고 칭찬했다. 남자아이들은 무술 시범을 선보였다. 공주 옷을 입고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딸을 보며 솔직히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여자는 귀엽고, 남자는 멋져야 한다”는 20세기 낡은 성 관념을 심어주는 건 아닌지 말이다.
 
“일본 여성은 유능하기보다 귀엽게 보여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2016년 한 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일본 남성들은 당차게 일 잘하는 여성보다 귀엽게 잘 웃는 여성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재능있는 여성조차 귀여운 척을 하고, 이런 ‘가와이 문화’가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불편함, 부당함이 있어도 따지기보다는 웃으면서 “다이죠부(大丈夫, 괜찮아)”라고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그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옷 가게에 걸린 여성복은 입고 싶은 옷보다는 입었을 때 “귀엽다”고 해줄 법한 옷들이 많다. 리본, 프릴, 레이스 셋 중 하나다. 패션 선진국이라 불리던 일본이 맞나 싶다.
 
18일 민사재판에서 승소한 이토 시오리(왼쪽). [EPA=연합뉴스]

18일 민사재판에서 승소한 이토 시오리(왼쪽). [EPA=연합뉴스]

지난주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은 일본판 ‘미투(Me too)’ 이토 시오리(伊藤詩織)의 사건을 보며, 그야말로 ‘가와이 문화’를 거부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인 지망생이었던 그는 2017년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데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상대는 정권의 핵심과 가까운 언론사 간부가 아닌가.
 
경찰, 검찰이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이대로 포기할 법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귀여워질 것을 거부했다. 2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겨우 민사 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검은 폴라티를 입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울지도 않았다.
 
“진짜 피해자는 웃지도,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는 상대측 남성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기자회견 내내 당당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일본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평등 순위에서 153개국 가운데 121위였다. 더 많은 이토가 ‘미투’를 외칠 수 있기를, 딸들의 당당한 활약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윤설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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