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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발상] 화산 폭발로 멸망? 백두산은 억울하다, 발해 최후의 20일

중앙일보 2019.12.23 15:29
백두산 천지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백두산 천지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함경도 부령에 이달 14일 오(午)시에 하늘과 땅이 갑자기 캄캄해졌는데, 때로 혹 누른빛이 돌기도 하면서 연기와 불꽃같은 것이 일어나는 듯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방에 꽉 찬 것 같기도 하였다. 큰 화로에 들어앉아 있는 듯하여 몹시 무더운 기운에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4경이 지나서야 사라졌다…아침에 가서보니 온 들판에 재가 내려 쌓였는데, 마치 조개껍질을 태워놓은 것 같았다. 경성(鏡城)에서는 같은 달 같은 날 조금 늦은 시간에 연기와 안개 같은 기운이 서북쪽에서 갑자기 밀려오면서 하늘과 땅이 캄캄해지고 비릿한 노린내가 사람들의 옷에 스며들었으며, 몹시 무더운 기운은 큰 화로 속에 앉아 있는 듯하였다.” (『숙종실록』 28년 5월 20일)
 

[유성운의 역발상] ‘해동성국' 발해가 20일 만에 망한 까닭은

함경도 경성(鏡城)은 조선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했던 전진기지입니다. 여진족의 침입 외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 지역에 1702년 6월 9일(숙종 28년 음력 5월20일) 기묘한 자연현상이 벌어져 조정을 놀라게 했습니다.  
 
백두산과 함경도 경성, 부령

백두산과 함경도 경성, 부령

“사람들 모두가 옷을 벗어 던졌으며, 땀이 흘러 끈적끈적하였다. 흩날리던 재는 마치 눈과도 같이 산지사방에 떨어졌는데, 그 두께가 한 치(寸) 가량 되었다. 걷어보니 마치 모두 나무껍질이 타다 남은 것과 같았다. 강변의 여러 고을들도 다 그러하였는데 간혹 더 심한 곳이 있었다”. (『숙종실록』 28년 5월 20일)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기이한 이 기운이 ‘서북쪽에서 밀려왔다’고 기록했지만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내막이 밝혀진 것은 현대에 와서입니다. 지질학자들은 당시 기록을 토대로 백두산을 지목했습니다. 경성에서 서북쪽으로 200㎞ 가량 떨어진 백두산의 화산활동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죠. 
 
영화 ‘백두산’의 흥행과 함께 백두산의 화산 폭발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백두산은 휴화산으로 화산활동을 잠시 멈춘 상태에 불과합니다. 학계에서는 화산활동이 언제든 재개될 수 있고, 백두산 일대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를 여러 번 내놓았습니다. 일각에선 북한의 핵실험이 화산활동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하면 영화 ‘백두산’처럼 서울까지 재난이 벌어질까요. 과거에도 서울까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을까요.
 
영화 '백두산'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덱스터스튜디오]

영화 '백두산'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덱스터스튜디오]

조선 시대에도 백두산 화산폭발 목격됐다

“흑기(黑氣)는 신이 목격한 것입니다. 그 기운은 비 같기도 하면서 비도 아니고, 연기 같기도 하면서 연기도 아닌 것이 북쪽에서오는데 소리는 바람이 몰아치듯, 냄새는 비린내 같기 도 한데 잠깐 사이에 산골짜기에 가득 차서 빛을 가려 지척에 있는 소와 말도 분별을 못할 정도였으니, 아, 역시 괴이한 일입니다. 가까이는 적성(積城)과 장단(長湍) 사이와 멀리는 함경도의 남쪽 경계까지 모두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효종실록』 5년 10월 2일)  
 
위에서 소개한 기록보다 반 세기 전인 1654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화산 활동이 한양 인근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경기도 적성과 장단과 함경도의 남쪽 경계까지 모두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윤성효 부산사범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가 쓴 『백두산 화산의 1654년 10월 21일 화산재구름 이동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당시 백두산에서 벌어진 플리니식(Plinian style eruption) 분화로 형성된 거대한 화산재 구름(ash cloud)이 바람에 의해 500㎞ 가까이 떨어진 경기도까지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플리니식 분화. 격렬한 폭발과 함께 암석 부스러기나 화산재가 버섯 모양의 연기가 되어 인근까지 퍼지거나 덮어버린다. 고대 로마의 폼페이 인근에서 폭발한 베수비오산도 플리니식 분화였다. [위키백과]

플리니식 분화. 격렬한 폭발과 함께 암석 부스러기나 화산재가 버섯 모양의 연기가 되어 인근까지 퍼지거나 덮어버린다. 고대 로마의 폼페이 인근에서 폭발한 베수비오산도 플리니식 분화였다. [위키백과]

 
플리니식 분화는 격렬한 폭발과 함께 암석 부스러기나 화산재가 버섯 모양의 연기가 되어 인근까지 퍼지거나 덮어버리는 형태입니다. 용암은 적지만 분출물이 광범위한 지역까지 피해를 입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를 덮은 베수비오산이 바로 플리니식 분화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폭발했던 백두산의 폭발은 폼페이 같은 재난을 가져오지 않고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는 당시 관찰된 특이한 자연 현상 외엔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890~1905께 폼페이 유적의 모습.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됐다. 폼페이는 지금까지도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고고학의 주요 관심사다. [사진 미 국회도서관]

1890~1905께 폼페이 유적의 모습.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됐다. 폼페이는 지금까지도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고고학의 주요 관심사다. [사진 미 국회도서관]

갑작스런 발해의 멸망, 화산 폭발 때문?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백두산이 가장 큰 규모로 폭발한 것은 10세기라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역사학계 일각에선 10세기의 백두산 대폭발을 발해(渤海)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가설엔 발해의 미스터리한 멸망 과정이 한몫 했습니다.  
698년 옛 고구려 영토에서 건국된 발해는 당나라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장악하는 등 200여년 넘게 거대한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멸망은 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925년 12월 16일 거란(요)의 지도자 야율아보기가 발해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발해의 멸망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25년 12월 21일 거란군 출병  
925년 12월 29일 발해의 요충지 부여성 포위
926년 1월 3일 부여성 함락  
926년 1월 9일 발해 수도 상경성 포위
926년 1월 12일 발해 항복 선언  
 
발해의 영토 [중앙포토]

발해의 영토 [중앙포토]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리며 최전성기를 이뤘던 때가 30년 전인 13대왕 대현석(871~894)의 치세였습니다. 그런데 거란이 아무리 강국이더라도 군사를 일으킨지 불과 20여일만에 멸망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거란이 군사를 일으키기 불과 1년 전(924년)엔 발해가 거란의 영역인 요주(遼州)를 선제공격해 요주자사를 살해하고 백성을 끌고 가는 등 만만찮은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학계 일각에선 급작스러운 재난이 발해의 멸망을 앞당겼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죠. 특히 10세기 폭발한 백두산의 화산재를 일본 홋카이도에서 발견한 일본 학자들은 이 정도 폭발 규모라면 한 국가를 패닉 상태로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화산 폭발로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틈을 타 거란이 기습을 가해 발해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죠. 
고대 그리스 문명의 초기 맹주였던 크레타도 화산 폭발로 세력을 잃었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가설로 치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맹주였던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 유적

고대 그리스의 맹주였던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 유적

 
반면 한국 학계에선 화산폭발설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 정도 사건이라면 중국 측 사서라도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거란의 발해 침공 과정이 담긴『요사(遼史)』를 비롯한 그 어떤 기록에도 화산폭발 멸망설을 지지해줄 만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해의 멸망, 화산은 잘못없다

발해 멸망의 진범을 두고 수십여년간 진행된 논쟁은 최근에 해소됐습니다.  
2017년 9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백두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오펜하이머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10세기 벌어진 백두산의 화산활동 시기를 ‘발해 멸망 이후’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는 “백두산 인근에서 채집한 낙엽송 나이테를 측정한 결과 백두산 분화는 946년 여름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했습니다. 따라서 오펜하이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백두산 분화는 최소한 발해가 20년 후에 벌어진 셈이죠.  
 
그렇다면 발해는 왜 멸망했을까요.
화산폭발 멸망설에 부정적이었던 학계는 발해 권력층의 내분,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갈등, 외교적 고립 등을 들고 있습니다.  
 
①발해의 내분=『고려사』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하기 1년 전인 925년 9월과 12월 세 차례에 걸쳐 발해 지도층이 백성들을 이끌고 귀순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앞서 3월에는 “태조 8년(925년) 3월 계축일에 두꺼비가 궁성 동쪽에 나타났는데 수없이 많았으며…여론이 발해(渤海)국이 우리나라에 귀순할 징조라고 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미 발해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런 동향이 고려까지 퍼져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드라마 '대조영'의 한 장면 [중앙포토]

드라마 '대조영'의 한 장면 [중앙포토]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에서도 “이심(離心ㆍ이반된 민심)을 틈타 군대를 움직이니 (발해와)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부여성이 무너진 뒤 발해는 3만명을 뽑아 수도까지 오는 길목인 홀한성에서 막게 했는데 거란 기병 500명에게 패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실상 전의(戰意)를 잃었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때 발해군을 지휘한 ‘노상(老相·높은 관직명으로도 추정)’이라는 인물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의해 중용됩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지도층이 분열해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일부 학자는 발해 지도부가 내부 분열을 묶기 위해 거란 침공(924년)이라는 강수를 택했다고도 합니다. 이전에 당나라와 신라를 상대로 벌이던 유연한 외교 노선 대신 강경론이 조정을 지배하면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이죠.
 
②외교적 고립=당나라가 망하고 5호 10국 시대가 펼쳐진 무렵 거란은 이미 동북아의 패자(覇者)였습니다. 925년 야율아보기가 서방을 원정하고 돌아오자 중원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후당(後唐)은 물론 일본, 고려, 신라까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년 전 요주(遼州)를 공격했던 발해만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최대 영역. 10세기 연해주부터 화북일대까지 장악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떠올랐다. [위키백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최대 영역. 10세기 연해주부터 화북일대까지 장악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떠올랐다. [위키백과]

지금에서야 발해, 신라, 고려 등을 하나의 민족 세력으로 묶어서 보지만 당시엔 철저하게 국익에 따라 적이 되거나 동맹이 되는 외국일 뿐이었습니다. 고려와 거란만 하더라도 훗날엔 적이 되지만 922년엔 거란이 고려에 낙타를 보냈고, 925년엔 고려가 거란에 사신과 답례를 보낼 정도로 사이가 원만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신라, 고려와 얕은 수준의 동맹 관계(結援)를 맺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로 발해가 위험에 빠졌을 때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926년 1월 발해 상경성이 포위돼 고립무원에 빠졌을 때 신라도 고려도 누구도 발해를 돕지 않았습니다. 
 
되려 이후 고려의 행보를 보면 발해 유민을 흡수해 국력을 키우는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요사(遼史)』에는 926년 발해 상경성 포위전에 신라군이 거란 편에서 참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때 신라군이 신라 중앙군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호족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크라스키노는 발해 사신들이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던 항구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크라스키노는 발해 사신들이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던 항구였다.

다만 그만큼 발해가 외교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랬기에 마지막 발해왕 대인선도 포위된 지 3일만에 항복했던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지만 우리 역사에 남긴 발해의 마지막 20일이 갖는 의미는 가볍지 않습니다. 냉엄한 국제현실 앞에서 힘과 이익이 바탕이 되지 않는 동맹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고불변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기섭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김은국 『남북국시대론과 발해 Diaspora』, 윤성효 『백두산 화산의 1654년 10월 21일 화산재구름 이동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고찰』, 윤성효·이정현 『백두산 화산의 1702년 강하화산재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발상(歷發常)]은 영화나 드라마, 공연 등에서 접하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 발견한 상식을 의미합니다. 작품 속에서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역사에 대해 재밌고 깊이있는 생각거리를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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