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승정원 조간신문 ‘조보’…임진왜란 때 이순신에게도 배달

중앙일보 2019.12.2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6)

 
유화문은 흥례문에 딸린 서쪽 행각에 있는 문으로, 서쪽의 궐내각사(闕內各司)로 들어가는 입구다. [사진 문화재청]

유화문은 흥례문에 딸린 서쪽 행각에 있는 문으로, 서쪽의 궐내각사(闕內各司)로 들어가는 입구다. [사진 문화재청]

 
경복궁 흥례문으로 들어서서 영제교를 건너 어도(御道)를 따라가다가, 근정문 못미처 왼쪽으로 꺾어지면 흥례문 행각 서편으로 유화문이 보인다. 그 규모가 작지 않은 문인데 바로 이 유화문 밖으로 경복궁의 서쪽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었다. 궐내각사란 궐 안에 들어와 있는 작은 실무 관청을 말한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궐외각사라 한다면,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여러 기구가 궐 안에 들어와 있는 작은 관청이 궐내각사다. 
 
궐내각사의 주요기구 중에는 행정을 담당하며 왕의 자문기구 역할을 하던 홍문관(옥당), 왕명출납을 맡았던 승정원, 대신들의 회의 공간 빈청이 있었다. 근정문의 서쪽에 있는 유화문은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관리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흥례문 일곽 근정문 앞에서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이 한 것이다. 
 
그리고 유화문 옆에는 두 칸짜리 작은 집 하나, 기별청이 있다. 기별청에서는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사안을 기별서리가 적어 매일 아침 반포했는데 이를 ‘기별지’라 했다. 기별지는 조정에서 아침마다 반포한다고 해서 ’조보(朝報)’라고 불렀다. 기별지는 승정원에서 발행한 관보이고 승정원은 바로 오늘 날의 대통령 비서실 격으로, 왕을 보좌하던 기구였다. 조선시대의 왕명 출납의 기능을 맡았던 승정원에서 정부의 주요 소식들을 필사해 중앙 및 기관의 관서를 중심으로 조보를 배포했다. 조보는 바로 정부의 정책 사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식을 전달하는 소식지로 현대의 신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보를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조지(朝紙)·기별지(寄別紙)·저보(邸報)·저지(邸紙)·난보(爛報)·경보(京報)·한경보(漢京報)·저상(邸狀) 등이었다.
 
기별청은 궁궐내의 우체국 같은 곳이다. [사진 문화재청]

기별청은 궁궐내의 우체국 같은 곳이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 초기에는 조보를 예문춘추관의 사관이 조정의 결정사항과 견문록 등을 기록해 각 관청에 돌렸다고 한다. 태종실록 13년 12월 16일 첫 번 째 기사에 조보의 호외 형식인 ‘분발(分發)’이라는 용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보의 발행이 이미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헌부(憲府. 사헌부)에서 정부(政府)의 이방녹사(吏房錄事)를 탄핵하였는데, 이달 16일 아조(衙朝)에 분발을 너무 늦게 한 것이 당상관들로 하여금 3엄(三嚴) 뒤에 예궐하도록 만든 까닭이라고 하였다.” 
 
해석을 하면 아조(衙朝), 매달 닷새마다 임금에게 올리는 업무보고에 승정원 서리(이방녹사)가 분발을 늦게 했기 때문에 당상관들이 3엄(嚴. 조회나 임금의 거둥 때 준비단계에서 세 번 울리는 북소리)이 끝난 뒤에야 입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위 관료들이 임금께 올리는 업무보고에 단체로 지각했기 때문에 사헌부에서 담당 녹사를 탄핵한 사건이었다. 녹사는 각종 문서의 작성과 다른 관부에서 보낸 공문서를 접수해 처리하는 동시에 해당 관부에 공문서를 발송하는 등의 실무를 담당한 정8품에서 정9품의 하급 관리였다. 여기에서 ‘분발’은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 이 사실을 조보를 발행하기 전에 먼저 초안해 관계되는 기관이나 관리에게 회람하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왕명의 출납, 각종 행정 사무와 의례(儀禮)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 [중앙포토]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왕명의 출납, 각종 행정 사무와 의례(儀禮)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 [중앙포토]

 
조보의 내용은 왕의 명령과 지시, 조정의 주요 결정 사항과 관리 임명에 따른 조정의 인사이동 소식, 과거 시험 날짜의 공고 그리고 외국과의 외교사항 등의 기사가 중심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충효나 정절 등에 관한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유생이나 관리들이 올리는 상소장의 내용을 공개하고 상소의 내용에 대한 국왕의 답변인 ‘비답(批答)’도 실렸으며, 중앙 및 지방 관서들로부터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올리는 각종 복명서와 보고서도 게재되었다. 
 
그 밖의 기사로는 천재지변이나 기문기사(奇聞奇事) 같은 자연 및 사회상도 보도돼 당시의 세상살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자연재해나 농사에 관한 정보도 알렸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면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같은 매스미디어의 정보 전달 역할을 했다. 조보는 1520년(중종 15년)에는 상·공관계자들에게 까지 배포돼 정보전달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승정원에서는 각종 사안에 관련된 수집 자료를 토대로 조보소(朝報所)에서 조보를 제작했다. 조보의 제작은 대량 인쇄의 방법이 아닌 철저한 필사에 의존했는데 필사는 기별서리가 했다. 그리고 조보의 제작 및 배포방식은 지역적인 조건이나 구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서울의 관리들이 보던 조보는 승정원에서 매일 1회 발행했으며 발행시간은 오전이었다. 지방의 독자들에게는 주로 5~10일, 또는 1개월분의 기사가 한 번에 배포되므로 기사의 구분은 날짜로 표시했다.
 
경북 영천시 용화사 지봉스님이 공개한 1577년 음력 11월 23일자 조보. 전날 밤의 날씨와 별자리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다. [중앙포토]

경북 영천시 용화사 지봉스님이 공개한 1577년 음력 11월 23일자 조보. 전날 밤의 날씨와 별자리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다. [중앙포토]

 
조보의 기사는 모두 한문만 사용했으나 이두식 표현이 인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독특한 글씨체가 사용되었던 것은 기별서리가 현재의 속기 양식같이 전달내용을 빠른 필체로 베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읽는 조보는 정자체에 가까운 글씨체로 써서 배포됐다. 선조 때  이형원이 조보를 졸필로 어지럽게 글씨를 써서 사람들이 해득할 수가 없게 하니, 기사의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청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게 했다. 요즘 말로 이형원의 필체가 악필이라서 보는 이가 판독하기 어려웠기에 면직시킨 것이다.
 
‘조보’라는 말은 중종실록에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다. 중종 3년(1508년) 3월 14일 첫 번째 기사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신(성희안)이 또 지난번에 북경(北京)으로부터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조보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으로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중종 즉위 초 성희안은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반정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고 중종 즉위의 인준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때 성희안은 탄핵을 받아 경질된 신료들의 인사이동 기사를 요동 땅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이 실록 기사로 볼 때 당시 조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지방이나 접경지역 우리 국정과 관계된 곳이면 어디나 배달됐으며 그 전달 시스템이 매우 체계화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 통제사의 병신년(1596년) 2월 18일 일기에는 체찰사의 전시 관련 비밀 공문 3통이 왔고, 저녁때 김국이 서울에서 비밀 공문 2통과 조보도 가지고 왔다고 쓰고 있다. 전쟁 중의 병영에도 조보가 빠르게 배달됐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이향우 이향우 조각가 필진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 교사로 명예퇴직 후 조각가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알리는 궁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궁궐에서의 오랜 활동을 바탕으로 조각가의 심미안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궁궐의 아름다움을 직접 그리고 글을 썼다. 우리 궁궐의 정다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