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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환자를 백조로, 근육 해방…마법의 ‘댄싱 퀸’

중앙선데이 2019.12.21 00:02
18일 공연의 클라이맥스였던 ‘백조의 호수’ 장면에서 세종대 이윤지 학생의 솔로. 뒤쪽 군무를 추는 ‘댄포파’ 수강생들의 얼굴은 본인들의 요구로 가렸다. 김경빈 기자

18일 공연의 클라이맥스였던 ‘백조의 호수’ 장면에서 세종대 이윤지 학생의 솔로. 뒤쪽 군무를 추는 ‘댄포파’ 수강생들의 얼굴은 본인들의 요구로 가렸다. 김경빈 기자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런웨이의 모델이 됐다고 상상하고 걸어보세요.”
 

‘피디 무브먼트 랩’ 강좌 연 파멜라 퀸
무용수로 활동 중 파킨슨병 걸려
춤추던 경험을 환자 치유에 활용

환자 “조금 힘들지만 무지 재밌다”
의사 “우울증 개선, 언어 표현 호전”

경쾌한 디스코풍 음악에 맞춰 발을 뗀다. 조금 전까지 구부정하게 잰걸음을 걷던 사람들은 없다. 대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사람들만 있다. 순간 누가 환자고 누가 가족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긴장의 순간도 잠시, ‘아리랑’ 연주에 맞춰 어느새 깊은 호흡을 내쉬는 움직임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여유롭다.
 
16일 오후 서울 혜화동 예술공간 서울의 ‘스튜디오 마루’는 ‘예술이 사람을 치유하는’ 현장이었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이사장 박인자)가 마련한 ‘파멜라 퀸의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무용 프로그램 워크숍’이다. 미국에서 온 파킨슨병 환우이자 ‘춤 선생’인 파멜라 퀸(65)이 40여 명의 환자와 가족, 강사들에게 무용을 통해 근육 경직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노하우를 공개하는 시간이었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2017년부터 은퇴 무용수 직업전환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파킨슨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댄스 포 피디(Dance for PD, 이하 댄포파)’ 강좌를 열고 있다. 우울증이 심한 파킨슨 환자의 정서와 심리를 염두에 두고 무용수 출신 강사가 친근한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창의적인 안무로 경직되어 가는 근육을 춤추게 하는 자리다.
 
파멜라 퀸의 프로그램 ‘피디 무브먼트 랩(PD Movement Lab)’은 ‘댄포파’와좀 달랐다. 20여 년간 무용수로 활동하다 42세에 발병해 20여 년간 파킨슨병 환자로 살고 있는 만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무용을 일상의 움직임에 적용하는 데 초점을 뒀다. 퀸의 고유한 방식은 파킨슨병 환자들의 이동성 향상에 혁신적인 접근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세계 파킨슨 회의 패널, 뉴욕대 협력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용의 일상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도전이다. 퀸은 아들의 축구수업에 따라갔다가 절던 다리를 회복한 경험을 들려줬다. “공을 차려면 무릎 아래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제 왼쪽다리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공을 찰 때는 정상으로 작동하는 걸 발견했죠. 나를 움직이게 할 적당한 환경과 도전이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밖에서도 공을 찬다고 상상하면서 ‘뻥, 뻥’ 하면서 걸었더니 정말 움직일 수 있더군요.”
 
“귀족이 됐다고 상상하라”는 주문과 왈츠 음악은 환우들을 유럽 궁정무도회로 데려갔다. “도전하라”며 바닥에 징검다리처럼 그어놓은 몇 개의 선은 환우들을 흥분시켰다. 퀸이 한 명씩 붙잡고 선을 따라 걷기를 유도하니, 얼떨결에 성큼성큼 다리를 건넌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시종 굳은 표정이던 환우 채봉석씨의 얼굴에도 성취감이 스쳤다. 몇 년간 그를 지켜봐온 ‘댄포파’ 강사들도 박수와 탄성을 쏟아낸다.
 
퀸의 방식은 댄포파 강사들에게도 새로운 통찰을 줬다. 김미영 강사는 “보폭이 좁았던 분이 한 번 경험 후 자신감 갖고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 놀랐다”며 “예술적 성취도 중심으로 조심하며 움직이는 ‘댄포파’에 비해, 퀸은 자신이 환우인 만큼 능력치를 알고 있어 동작이 더 도전적이다. 일상 적용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상상력과 도전이 움직임 바꿔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18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곱게 튀튀를 차려 입은 ‘백조’의 등장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실제 발레 공연에서 주역이 입장하는 순간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흐르는 가운데 세종대 이윤지양의 오데뜨 솔로에 맞춰 환우들이 백조 군무를 춘다. 의자에 앉은 상태지만 상체는 고전 안무 그대로다. 음악이 트위스트로 바뀌자 환우도 관객도 저절로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캐롤에 맞춰 산타 모자를 쓰고 다 함께 신나게 만든 상상 속 ‘눈의 나라’에서 모두 하나가 된다.  
 
‘댄포파’ 수강생들이 젊은 안무가 김무현씨의 지도로 한 달여 준비한 ‘발레를 바탕으로 한 겨울과 크리스마스’ 공연은 25분가량의 짧은 분량이지만 감동의 밀도는 대단했다.
 
공연을 마친 환우들은 벅차 보였다. 최진경씨는 “조금 힘들었지만 무지하게 재미있었다”며 “멋있게 안무해준 선생님이 고맙다. 우린 어디를 가기가 두려운데, 환우들과 만나고 또 우릴 이해해 주는 선생님 만나러 오는 게 마치 친정집에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 박인자 이사장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아름다운 발레 공연에 직접 참여하며 잠시라도 환자임을 잊고 행복을 느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다”고 전했다.
 
보호자들도 함께 춤을 추며 얻는 게 많다고 했다. 김영철씨는 “아내가 자다가도 춤추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면서 “항상 자기가 먼저 가자고 해서 2년째 오고 있다. 난치병이지만 단톡방에서 정보도 공유하면서 동병상련으로 질환을 이겨내고 있다. 공동체의 유익이 큰데, 홀로 투병하는 사람들에게 확산되면 좋겠다”고 했다.
 
‘댄포파’는 현재 24개국 250여 개 커뮤니티에서 시행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문무용수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서울의 스튜디오 마루를 비롯해 인천 라이언 요양병원, 광주 파킨슨행복쉼터,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대구서부보건소 등에 시범 클래스가 개설돼 강사가 파견된 바 있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발레 공연도
 
댄스테라피의 개선 효과에 대한 연구도 흥미롭다. 2011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이 8개월간 11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표 참조)에 따르면 전신 경직과 손떨림, 안면 경직 등이 상당히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댄포파’ 강좌를 6개월간 관찰·실험하고 있는 고성범 교수는 “운동기능 평가는 아직 분석 전이지만, 우울증 개선과 언어 표현 호전이 두드러진다”면서 “언어습관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어둡고 말수가 적던 분들이 먼저 좋다고 얘기를 꺼내고, 음성이 작고 어휘가 단조롭던 분들의 표현이 명확해지고 어휘구사도 다양해졌다. 발음 근육과 감정 두 가지 측면이 모두 개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평했다. 고 교수는 이어 “국가적 관심을 받고 있는 치매안심센터와 연계하면 확산이 빠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킨슨병 걸려도 숨지 말고,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하라
파멜라 퀸

파멜라 퀸

파멜라 퀸은 2006년부터 뉴욕 브루클린에서 ‘PD Movement Lab’을 운영 중이다. 걸음걸이가 살짝 독특했지만 서울까지 동행 없이 혼자 왔을 정도로 큰 불편 없이 생활한다. “초기에 의사들은 춤을 그만두고 움직임을 최소화하라고 했죠. 나는 무용수였기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움직임은 내 정체성이었으니까요. 반대로 더 많이 움직이기로 했죠. 그래야 악화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젊은 현역 무용수가 어쩌다 파킨슨병에 걸렸나.
“가족력도 없고 파킨슨이 발병할 만한 DNA도 없었다. 많은 환자들이 오랜 시간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는데, 나도 그랬다. 출산 직후에 남동생이 실종돼서 잠을 못 자는 날들이 계속됐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가 촉진제처럼 작용한 것 같다.”
 
직접 클래스 운영까지 나선 이유는.
“무용 안에는 음악, 흉내, 접촉 등 파킨슨병에 도움이 되는 열쇠가 많다. 처음엔 나보다 증상이 심하고 우울한 환자들과 만나는 것이 걱정도 됐지만, 생각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다. 남을 돕는 도구가 됐다는 사실이 내 영혼을 도왔다. 병은 나에게서 앗아간 게 많지만 창의성, 공감능력 같은 선물도 줬다. 내가 겪은 경험들의 깊이를 공유하고 싶다.”
 
미국 환자들은 공연도 자주 한다던데, 어떤 의미가 있나.
“환우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불편해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그런데 공연은 나서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니 만큼 굉장히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 변화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측면도 있다.”
 
당신의 클래스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체적으로는 스트레칭이 가장 중요하고,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다. 소속감을 느끼고 내가 있는 걸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는 게 중요하다. 파킨슨은 옷과 같다. 부끄러운 옷을 입었다고 집에 숨지 말고, ‘네 형제의 배가 건너게 도와주면 너 역시 건너게 될 것’이라는 중국 속담을 기억하면 좋겠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나누는 데 삶의 의미가 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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