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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모임서 우연히… 쇼팽과 상드, 마지막 만남이었다

중앙일보 2019.12.20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55)

 
1848년 2월 혁명 중의 파리의 시가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둘러싼 전투모습. [사진 Wikimedia Commons]

1848년 2월 혁명 중의 파리의 시가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둘러싼 전투모습. [사진 Wikimedia Commons]

 
혁명의 와중에 이루어진 두 사람의 재회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왕정은 중도성향의 타협정권이었다. 18년 동안 지속된 그 정권은 구체제(Ancien Régime)의 봉건 귀족들과 새롭게 돈을 모은 신흥 세력과의 연합체의 성격을 지녔다. 루이 필리프 왕정기간 동안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부가 쌓였고 지배계급의 부는 더 늘어났다.
 
돈에 휘둘린 고위 관리들 때문에 정부의 부서 중에 스캔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프랑스는 하나의 기업 같았고 힘을 가진 자들은 온갖 이권을 누렸다. 각종 산업의 발달에 따라 모르는 사이에 중소 상공업자와 노동자의 수도 급히 늘어나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계급간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1845년과 1846년의 감자, 밀 흉작은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계층의 생활수준을 급격히 떨어트렸다.
 
파리에는 파산이 급증했고 실업은 만연했다. 수척한 군중은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불안은 커져갔다. 1848년 2월 22일 정오, 군중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내각이 사퇴했지만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군대는 폭력으로 이를 진압하려 했다. 격렬한 시가전으로 벌어졌다. 첫 일제 사격이 일어난 곳은 쇼팽의 스쿠아르 도를레앙 아파트 근처였다. 쇼팽의 연주회가 있고 1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총을 맞은 시신은 도로에 쌓여갔다. ‘살인자 물러가라’는 함성이 울렸다. 왕은 왕위를 버리고 영국으로 달아났다. 쇼팽과 동행했던 루이 필리프의 왕정이 무너진 것이다. 총소리가 들려왔고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겨울이면 중환자가 되는 쇼팽이었다. 병약한 그에게 마차가 필요했지만 어지러운 도시에서 마차를 구할 수 없었고 쇼팽은 집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쇼팽을 찾는 방문객도 끊어졌다. 자주 만나던 상드의 딸 솔랑주는 출산을 앞두고 길러리(Guillery)의 아버지 자택에 몸을 의탁했다. 연회, 파티, 살롱모임들도 끊겼다. 가게와 극장도 문을 닫았다. 귀족들은 혼란을 피해 시골로 내려가거나 영국으로 갔다. 레슨 받는 학생도 사라졌다. 쇼팽의 두 번째 연주회도 취소될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바르샤바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왕정을 대신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상드는 솔랑주의 결혼과 그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 그리고 쇼팽과의 결별까지, 많은 일들로 심신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발발과 왕정의 타도 소식에 활력을 되찾았다. 왕국을 대신하는 공화국은 상드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상드는 즉시 파리로 올라왔고 행동파들에 합류했다.
 
조르주 상드. 토마 쿠튀르의 목탄화. 1850년경. 베르사이유 궁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조르주 상드. 토마 쿠튀르의 목탄화. 1850년경. 베르사이유 궁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상드가 파리에 도착 한 날, 솔랑주는 딸을 낳았다. 애기는 건강해 보였다. 이틀 후 쇼팽은 젊은 외교관 콩브(Edmond de Combes)와 함께 마를리아니 부인의 저녁초대에 응했다. 부인은 이혼을 겪으며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려져 있는 쇼팽을 염려했다. 서로는 위로를 건넸다. 한숨과 눈물, 아쉬움이 뒤섞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대화도 오고 갔다.
 
식사 후 쇼팽이 떠나려는데 막 상드가 그 집에 도착했다. 현관에서 상드와 마주친 쇼팽은 움찔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솔랑주 소식을 들었냐고 물었다. 상드가 못 들었다고 하자 솔랑주가 아기를 낳았고, 손녀의 탄생을 처음 알려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간단한 인사 후 돌아서서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다 내려왔을 때 못다한 말이 생각났다.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콩브를 계단 위로 보냈다. 콩브는 올라가서 상드에게 산모와 아이는 건강하다는 말을 대신 전했다. 쇼팽이 계단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려오는 콩브를 따라 상드가 따라왔다. 그녀는 딸과 아기의 상태에 관심을 보였다. 쇼팽은 산통이 있었지만 아기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솔랑주의 말을 전했다.
 
상드는 쇼팽의 건강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어. 그리고는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 문지기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 쇼팽은 다음날 솔랑주에게 상드를 만난 소식을 전했다. 이것은 쇼팽과 상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쇼팽과 솔랑주는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둘 다 버려졌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쇼팽은 상드에게 미련을 못 거두고 있었다. 발표되는 상드의 소설에는 귀가 솔깃했다. 그는 노앙이나 상드에 관한 소식, 상드와 솔랑주의 편지 왕래 등에 대해 바르샤바의 가족들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쇼팽이 콩브를 통해 전하려 한 것은 못다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남은 미련이었을까?
 
상드에게 그 마지막 순간은 달랐다. 그녀는 훗날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손을 지긋이 잡았다. 손은 차가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더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빼고 돌아섰다. 나는 그를 따라 쫓아 갔다. 그를 돌려세웠을 때 그는 증오에 찬 눈길을 내게 주었다.”
 
상드는 쇼팽의 미련을 보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했다. 상드는 이미 마음을 닫았고 쇼팽도 그러하기를 바랐음이 분명했다. 콩브는 쇼팽을 부축하여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젊은 외교관 콩브의 눈에 쇼팽은 슬프고 우울해 보였다. 많은 것을 잃은 쇼팽은 가벼웠다. 안타깝게도 쇼팽이 탄생을 전한 솔랑주의 딸은 5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솔랑주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프레데릭 쇼팽. 폴린느 비아르도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프레데릭 쇼팽. 폴린느 비아르도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에게 아기 탄생의 소식을 들은 상드도 솔랑주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산모가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상드는 바빴다. 그녀는 그 후 다시 노앙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관심사는 혁명의 이념을 노앙 지방에 전파하는 것과 수양딸 오귀스틴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쇼팽이 아기의 탄생에 기뻐했을 때 상드는 공화국의 탄생에 들떠있었다.
 
다시 파리로 복귀한 상드는 임시 정부에서 정부기관의 행사에 대한 설명과 홍보를 하는 ‘공화국 공보’를 발행하고 편집하는데 참여했다. 상드는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당시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와 편지를 주고 받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다.
 
2월 혁명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혼란 속에 빠트렸다. 임시정부는 음악, 미술, 문학을 등한시했다. 모든 예술가들은 경제적 곤란과 안전의 위협에 빠졌다. 생활자체가 어려웠다. 얼마 후 파리의 상점은 다시 열었지만 손님은 없다. 외국인은 어지러운 프랑스를 탈출하려 했다. 여권을 들고 파괴된 철도가 복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쇼팽은 심한 신경통에 침대에서 떠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상황도 그를 구금상태로 몰아넣었다. 학생이 모두 떠났으므로 레슨도 할 수 없었고 경제적 상황은 걱정거리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독과 함께 바르샤바의 가족 생각은 더 간절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답답할 뿐이었다.
 
프랑스의 혁명 발발 후 영국으로 돌아가 있던 쇼팽의 제자 제인 스털링이 편지를 보내왔다. 제인은 어수선한 파리를 피해 영국으로 오라고 권했다. 이미 영국에는 많은 그의 친구 음악가, 예술가들이 건너가 있었다. 폴린 비아르도는 벌써 그곳에 있었고 리스트와 멘델스존도 그곳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열고 있었다. 런던에도 쇼팽 애호가들이 많았다. 제인은 쇼팽도 영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했던 쇼팽이었다. 이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파리를 떠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파리는 시끄러웠다. 당장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은 문제였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딱히 다른 도리도 없었다. 1848년 4월 19일 도버 해협을 건넜다. 뱃멀미가 없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다음날 희뿌연 스모그에 덮인 런던이 보였다.
 
Le Beau Candidat(좋은 후보). 1848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조르주 상드가 급진주의자 루이 르드뤼-롤랭을 밀고 있는 그림. 이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며 프랑스에 제2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상드가 지지했던 후보는 선거에서 5% 득표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Le Beau Candidat(좋은 후보). 1848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조르주 상드가 급진주의자 루이 르드뤼-롤랭을 밀고 있는 그림. 이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며 프랑스에 제2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상드가 지지했던 후보는 선거에서 5% 득표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한편, 2월 혁명 후 임시정부를 이끌던 급진파 – 상드와 그녀의 친구들이 주동이었던 – 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급진파는 큰 표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격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6월의 유혈 사태를 겪었고 급진파의 다수는 체포되기도 했다.
부르주아지가 다시 힘을 찾았지만 그 후로도 파리 시내에서 전투는 계속되었고 일상은 아주 느리게 정상화되었다. 2월 혁명의 결말은 12월에 치르진 대통령 선거결과 들어선 제2공화정이었다.
 
다음은 스모그에 쌓인 런던에서 갑갑해하는 쇼팽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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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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