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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경총 50주년에 부쳐…합리적 야생성을 찾아라

중앙일보 2019.12.18 00:19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이건 꼰대의 전형이다. “근로시간을 주52시간으로 단축한 건 과도하다. 좀 더 일해야 한다.”(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주 100시간 일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민경욱 한국당 의원) 근로시간 단축은 여야나 노사를 떠나 공감하는 시대 소명이다.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룬 이유다. 당시 집권당은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다. 대타협에 격하게 찬성했다. 지금 딴지를 거는 건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오히려 부작용을 없애려 노력하는 게 맞다. 그 방법 또한 노사정 대타협문에 새겨져 있다. 탄력근로제와 같은 유연한 근무체계, 임금체계 개편 등이다. 이걸 무시한 게 누군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한국당조차 외면했다. 무턱대고 근로시간만 줄였다. 산업현장의 혼란은 그 여파다.
 
정치권은 그때그때 말이 다르니 그렇다고 치자. 노사정 대타협 당시 경영계를 대표한 주역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뭐 하는가. 노사정 합의 정신을 훼손하는 정치권에 지나치게 묵묵하다.
 
경영 현실은 야생이다. 그런 야생의 세계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 한국노총이 정부발 정년 연장 논의에 “이르다”며 선을 그은 것도 그 룰을 존중해서다. 취업 전선을 떠도는 청년을 걱정했다. 내 잇속보다 합리적 판단이 읽힌다.
 
경총은 정년과 관련해 국제적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정년 60세 시행 9개월 전인 2015년 3월이다. 경총을 찾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대표단이 “50대 중반에 회사를 나가면 기업은 누가 꾸리냐”고 물었다. 경총 측은 당황해서 답도 제대로 못 했다. 게이단렌의 질문엔 ‘경총은 그동안 뭐했나. 숙련인력 확보를 위해 조기 퇴직 바람을 먼저 나서 잡아야 하지 않느냐’는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게 야생의 룰이다. 노조와의 힘 대결만이 능사가 아니다. 게이단렌 같은 정책 능력이 중요하다.
 
물론 현 정부의 경영계 무시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많다. 김영배 전 부회장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부작용 지적에 발끈하는 대신 제대로 분석만 했어도 지금처럼 비정규직 문제로 발목 잡히는 일은 없었을 게다. 한데 요즘은 이런 야생성을 경총에서 찾기 힘들다.
 
며칠 전 중소기업중앙회와 한국노총이 대기업의 갑질에 맞서자고 손을 잡았다. 경총에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대기업과 오너의 갑질에 눈도 끔쩍하지 않는다면 경영계의 대변인 자격이 없다. 예방책을 내놓고, 회원사를 다그치고, 협조를 구해야 마땅하다. 김용균씨 사망으로 촉발된 산업안전 문제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근로자 없이 국가 경제가 돌아가는가.
 
정권 초 경총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함께 고사위기에 몰렸다. 고용보험심의위원회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정부가 인가한 유일한 전국 단위 사용자 단체에 가해진 폭정이다. 그래도 말 한마디 못 했다. 보다 못한 당시 정광호 한국노총 사무처장이 “노사 파트너도 없이 어떻게 사회적 대화를 꾸리는가”라며 정부 고위층에 항의했다. 그 덕에 기사회생했다.
 
그렇게 한숨 돌린 경총이 지금은 어떤가. 내부 파워 게임에, 경조사비 일방 삭감과 같은 권위적 경영으로 직원과 임원 간에 고성이 오가는 등 분란까지 더해져 혼돈 그 자체다. 이래서야 ‘산업평화’라는 설립 취지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
 
정광호 전 사무처장은 당시 이런 말도 했다. “왜 애완동물을 들고양이로 만들려 하나”라고. 주는 것 받아먹고 투정만 해서는 애완동물 대접밖에 못 받는다. 내년이면 지천명(知天命·50살)이다. 그동안 많은 족적을 남겼다. 다음 반세기를 향한 발걸음엔 야생의 활달함이 묻어나길 바라서 하는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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