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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영화 데뷔 전 치과의사 땐 최무룡·김혜자도 내 손님

중앙일보 2019.12.17 00:04 종합 14면 지면보기
아내 김선희(맨 오른쪽) 여사는 배우 신영균(왼쪽)씨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신씨가 1960년대 중반 어머니 신순옥 여사, 아들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아내 김선희(맨 오른쪽) 여사는 배우 신영균(왼쪽)씨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신씨가 1960년대 중반 어머니 신순옥 여사, 아들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치과의사를 하다가 머리 깎고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남편을 뜯어말리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을까. 아내 김선희(84)는 하나뿐인 반려자이자, 유능한 매니저였다. 또 훌륭한 사업 파트너였다. 내가 한눈팔지 않고 연기에 집중한 건 아내의 조력 덕택이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39)
<10> 군 복무시절 만난 아내 김선희

1년 연애 뒤 결혼, 해군 관사서 살림
한겨울 창호지 뚫린 방서 첫날밤
치과 개업 뒤 영화배우한다하자
아내 “내가 딴따라랑 결혼했냐”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55년 서울 치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할 때다. 해군 중위로 임관해 서울 해군본부에 있을 때, 한 친구가 부탁을 해왔다. 친척의 어린 딸이 무용 공연을 하는데 무대 화장을 도와달라는 거였다. 배우들이 직접 화장을 하던 때라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중에 보니 그 꼬마가 아내 친언니의 딸이었다.
  
반대하던 아내 나중엔 매니저 역할
 
아내를 처음 본 순간 서글서글한 눈매와 미소에 사로잡혔다. 그 후 종로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데이트를 신청했다. “또 만난 것도 인연인데 커피나 한잔 할까요.” 해군 제복을 입은 외모와 남자다운 음성에 아내도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내를 만난 어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이런 여자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누구랑 하겠니. 네가 싫다고 하면 내가 죽겠다.”
 
1년 연애 끝에 56년 11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형편상 신혼여행은 엄두를 못 냈다. 아내는 이화여대 정외과 2학년이었고, 내 군인 월급은 쥐꼬리였다. 결혼 다음 날 새벽 기차를 타고 경남 진해로 갔다. 신혼 초부터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해군 관사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할 요량이었는데 막상 가 보니 두 평도 안 되는 단칸방이었다. 한겨울에 창문 창호지가 다 뚫려 있었다. 있는 거라곤 담요 하나와 양념 조금 싸 온 게 전부였다. 담요로 대강 찬바람을 막고 첫날밤을 보냈다.
해군 군의관 복무 시절의 원로배우 신영균씨.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해군 군의관 복무 시절의 원로배우 신영균씨.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그래도 신혼인데 외식이 어때요.”
 
“그렇게 해서 언제 돈을 모아요. 제가 장을 봐올게요.”
 
아내는 새벽시장에서 냄비와 풍로, 숯불을 사와서 밥을 지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가족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연기도 잠시 접었던 내가 아니던가. 당시 통장에는 5만원밖에 없었다. 요즘 500만원 정도니 생활 밑천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돈을 벌려고 진해에서 서울치과를 열었다. 당시 군의관들은 낮에는 군인으로, 밤에는 의사로 살 수 있었다. 외식·영화구경·나들이 등 모든 경비를 아꼈다. 그렇게 한푼한푼 모아 제대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차렸다.
 
최무룡, 허장강, 김혜자(왼쪽부터)

최무룡, 허장강, 김혜자(왼쪽부터)

개업했다고 바로 형편이 나아지진 않았다. 효자동 집을 처분하고 한동안 치과 안에 있는 다다미방에서 지냈다.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까지 셋이 몸을 눕힐 공간은 됐지만 겨울에는 추위가 문제였다. 석유난로를 피우고 잠들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생활이 조금 자리를 잡으니 연극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배우 변기종씨의 권유로 국립극단에 들어갔다. ‘빌헬름텔’ ‘여인천하’ 등에 출연하며 치과의사, 연극배우 1인 2역을 했다. 연극으로 인연을 맺은 병원 손님들도 생겨났다. 허장강·최무룡·윤일봉씨 등이 치료를 받으러 왔다. 최무룡은 영화 ‘5인의 해병’ ‘남과 북’ ‘빨간 마후라’, 허장강은 ‘상록수’ ‘물레방아’ ‘서울의 지붕밑’, 윤일봉은 ‘애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함께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혜자씨도 동남치과에 왔다는 얘기를 한참 후에 듣게 됐다.
원로배우 신영균씨의 치과의사 면허증.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원로배우 신영균씨의 치과의사 면허증.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내가 딴따라랑 결혼했느냐, 영화만큼은 안 된다”는 아내였지만 충무로에서 가장 큰 힘이 돼준 사람도 바로 아내다. 아내는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를 연기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 양반은 탤런트를 타고났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랑 결혼”
 
막상 영화배우가 되니 ‘겹치기 출연’ 때문에 스케줄 관리가 늘 문제였다. 차에서 쪽잠을 자는 나를 보고 현장 스태프들이 “시간 없다. 빨리 가자”고 재촉하면 아내가 “좀 주무시게 놔두세요”라며 승강이를 벌이곤 했다. 오전·오후·밤, 하루에 서로 다른 영화 세 편을 찍는 날이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도 헷갈렸다. 양말·넥타이 색깔까지 일일이 챙겨준 아내가 없었다면 그 바쁜 일정을 어떻게 다 소화했을까.
1960년대에는 영화배우들이 출연료를 제때 못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신영균씨의 아내 김선희 여사는 출연료 장부를 꼼꼼히 기록해 받아냈다. 김경희 기자

1960년대에는 영화배우들이 출연료를 제때 못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신영균씨의 아내 김선희 여사는 출연료 장부를 꼼꼼히 기록해 받아냈다. 김경희 기자

 
당시 아내가 깨알 같이 적어놓은 출연료 장부를 보면 지금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촬영이 중단되거나 흥행에 실패하면 돈을 떼이기 십상이던 시절이다. 아내는 “아직 입금 안 됐으니 촬영을 미뤄라”는 코치까지 해줬다. 아내는 내가 나온 신문기사는 물론 대본까지 수집했다. 한번은 이사를 하면서 고모님이 엿장수한테 그간 모은 자료를 팔아버렸는데 아내는 그걸 되찾겠다며 온갖 고물상·골동품점을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 아내와 결혼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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