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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와 쿠바 혁명 이끈 한인,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중앙일보 2019.12.15 08:00
다큐멘터리 '헤로니모' 한 장면. 쿠바의 한인 4, 5세 후손들은 여전히 "내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다큐멘터리 '헤로니모' 한 장면. 쿠바의 한인 4, 5세 후손들은 여전히 "내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아버지는 쿠바의 에네켄(용설란, 선인장의 일종) 농장 일꾼으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보탠 독립운동가였다. 이웃 한인들과 매 끼니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1938년부터 8년간 임시정부에 1489원 70전을 보냈다. 이런 사실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됐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은 쿠바 한인 최초로 대학에 진학했고,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이 됐다. 쿠바 산업부 차관을 역임하며 9차례 훈장도 받았다. 지금껏 쿠바 한인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는 아버지 임천택과 아들 임은조(헤로니모 임) 부자 얘기다.  

1만 돌파 쿠바 한인 다큐 '헤로니모'
쿠바 혁명 이끈 한인 헤로니모 임 조명
부친은 쌀 한 숟가락씩 독립자금 보태

쿠바 여행갔던 재미교포 변호사,
이 부자에 감동해 사표쓰고 다큐 연출
"난민 중에도 그들 나라 헤로니모 있죠"

젊은 시절의 헤로니모 임. 다큐에 나오는 쿠바 내 최고령(93세) 한인 배이형씨는 "헤로니모는 우리 모두를 위한 변호사 같았"고 말했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젊은 시절의 헤로니모 임. 다큐에 나오는 쿠바 내 최고령(93세) 한인 배이형씨는 "헤로니모는 우리 모두를 위한 변호사 같았"고 말했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지난달 2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는 이 부자를 중심으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조국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쿠바 한인들에게 다가간 영화다. 재미교포 변호사 전후석(35) 감독이 4년 전 쿠바에 여행 갔다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본업(코트라(KOTRA) 뉴욕 무역관 변호사)까지 그만두고 장편 다큐에 도전했다.
 

변호사 그만두고 다큐 찍은 이유 

묵기로 한 호스텔에서 쿠바 공항으로 그를 마중 보낸 택시 운전사가 헤로니모의 딸 패트리샤 임이었다. 다음날 초대받아 간 그의 집 거실 한가운데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9일 서울 서소문동 카페에서 만난 전 감독은 “그렇게 헤로니모와 그 아버지 임천택 선생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감동했다”며 “영화로 만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로 영화감독에 데뷔한 전후석 변호사를 9일 서울 서소문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로 영화감독에 데뷔한 전후석 변호사를 9일 서울 서소문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학부시절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에서 다큐를 공부하며 한인 입양아·위안부·독도·LA폭동사건 등 사회적 주제의 단편을 많이 찍었고, 카메라 뒤보단 직접 법을 실행해야 세상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시라큐스대 로스쿨에 진학했다는 그다.  
쿠바에 처음 간 이듬해인 2016년 전 감독은 조촐한 촬영팀을 꾸려 다시 쿠바를 찾았다. 100여명 한인 후손을 만나 인터뷰했다. ‘헤로니모’의 시작이었다.  
 

쿠바의 우연한 만남, 인생 바꿨다 

다큐 도입부, 4년 전 전후석 감독(왼쪽)이 쿠바로 여행갔을 때 찍은 영상이다. 자신을 데리러 온 택시운전사가 한인 4세 쿠바인이라며 신기해하는 모습. 옆의 운전자가 바로 헤로니모 임의 딸 패트리샤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다큐 도입부, 4년 전 전후석 감독(왼쪽)이 쿠바로 여행갔을 때 찍은 영상이다. 자신을 데리러 온 택시운전사가 한인 4세 쿠바인이라며 신기해하는 모습. 옆의 운전자가 바로 헤로니모 임의 딸 패트리샤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전 감독의 카메라는 기교 없이 친근한 안내자처럼 관객을 이끈다. 그런 소탈함 덕일까. 그가 새로 눈뜬 쿠바 한인 ‘코레아노’의 역사와 의미가 스크린 너머까지 담백하게 전해온다. ‘국뽕’을 자극하는 요소는 최대한 피했다는데도 있는 그대로의 삶이, 뒤늦게 알아 미안한 세월이 가슴을 파고든다.
제작 자금도 이런 사연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올려 모았다. 후반작업을 끝내고 개봉하기까지 국내외 199명이 십시일반 4만4982달러(약 5300만원)을 후원했다. 여기에 가족, 지인들이 자금을 더했다. 전 감독이 뉴욕에서 알고 지내며 멘토처럼 따랐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UN에 있던 시절 이 프로젝트를 먼저 알고 힘을 보탰단다. 
 

일본회사 광고에 속아 멕시코 사기 이민

영화엔 임천택이 두 살 때 홀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행 배에 오른 순간부터 소개된다. 1905년 일본의 인력송출회사의 사기 이민 광고에 속아 조선사람 1033명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바다 건너 멕시코로 갔다. 지상 낙원을 꿈꿨지만, 이들을 기다린 건 에네켄 농장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 당시 '황성신문'에 실린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는 이런 문구로 참상을 알렸다. “이곳 한인은 7등 노예가 되어 우마 같다.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구타당해 피가 낭자하여 차마 못 볼 모습에 통탄 통탄이라 하였더라.”
계약 기간 4년이 끝났을 땐 한일합병으로 돌아갈 조국이 사라졌다. 멕시코 농장이 문을 닫자, 일부는 다시 쿠바의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했다. 뙤약볕에 두꺼운 옷을 입어도 날카로운 에네켄 가시가 생살을 파고들었다. 한글을 깨치기 전 낯선 나라에 와 배고픔을 이겨내면서도 그들은 자식들에 조국을 잊지 말라 가르쳤다.
임천택(오른쪽) 부부와 어린 아들 헤로니모 임의 가족 사진이다. 쿠바에 새롭게 정착하기 전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한인들은 훨씬 처참한 처지였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임천택(오른쪽) 부부와 어린 아들 헤로니모 임의 가족 사진이다. 쿠바에 새롭게 정착하기 전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한인들은 훨씬 처참한 처지였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우리는 가난했지만, 자식들만큼은 우리처럼 살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생전 남긴 유일한 영상에서 임천택은 말했다. 열여덟 살에 쿠바로 이주해 맨몸으로 8남매를 키운 그는 맏아들 헤로니모가 공부하겠다고 고집하며 혼자 힘으로 대학에 가자 크게 기뻐했다. 쿠바 한인 최초였다. 쿠바 마탄사스 종합대에 입학한 헤로니모는 수재 때 구호품을 빼돌린 부패 관리들에 반박해 집회를 열었다가 구속됐다. 출소 후 아바나 법학과로 옮겨, 동갑내기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그렇게 쿠바 혁명의 전기가 시작됐다.  
 

평생 그리던 조국, 죽어서 찾아 

쿠바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한국과의 교류가 단절되며 임천택을 비롯한 쿠바 이민 1세대는 살아서는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아들 헤로니모는 달랐다. 1967년 북한에 외교관 신분으로 방문했던 그는 은퇴 후 1995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돌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돼 한국을 찾았다. 
1995년 헤로니모 임(왼쪽 다섯 번째)이 쿠바 한인 대표로 생전 처음 한국을 찾은 모습이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1995년 헤로니모 임(왼쪽 다섯 번째)이 쿠바 한인 대표로 생전 처음 한국을 찾은 모습이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이때 방한으로 아버지 임천택의 독립운동 활동이 알려지며 임천택은 2년 뒤 적성국가 출신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임천택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헤로니모 역시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아 쿠바 내 900여명의 한인을 직접 찾아다니며 명부를 만들고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인 공동체를 재정비했다. “헤로니모는 우리 모두를 위한 변호사 같았지.” 영화에 나오는 쿠바 내 최고령(93세) 한인 배이형씨의 말이었다.  
올해 광복절엔 전 감독이 이런 내용을 한 시간여로 축약한 버전이 ‘KBS스페셜-헤로니모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방영됐다. 30여분이 긴 극장판 영화는 이에 더해 한인 디아스포라, 즉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재외동포의 이야기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전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대한민국, 재외동포가 일군 나라 

전 감독은 “800만 디아스포라가 한반도 밖에 있다. 한국은 인구 대비 디아스포라가 전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라며 그럼에도 “왜 디아스포라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거나 신경 쓸 여유가 안 됐을까” 반문했다.  
전후석 감독(윗줄 왼쪽 네번째)이 다큐 '헤로니모' 촬영팀과 헤로니모 임의 가족들. [사진 전후석]

전후석 감독(윗줄 왼쪽 네번째)이 다큐 '헤로니모' 촬영팀과 헤로니모 임의 가족들. [사진 전후석]

“대한민국도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디아스포라가 지원해서 만들어졌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2년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평생 남으셨죠. 후손들이 미국 전역에 살고 있어요. 안중근 의사도 후손이 다 LA에 살고 있어요. 이분들도 재외동포 아닌가요. 중국 상하이·만주·연해주에도 우리 근간을 이룬 독립 후손들이 살고 있죠. 그런데 왜 우리는 디아스포라에 대해 나라를 떠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들의 공헌이나 현재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까요.”

 

철저히 미국 사람 되려했던 그때 

전 감독 자신도 미국에서 태어나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에 귀국, 초·중·고를 한국에서 다녔던 경험이 있다. 고1 때 미국으로 이민가선 조셉(Joseph) 전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다큐를 제작하며 변호사 일을 막 그만둔 2년 전 전후석 감독은 한국에 와 본지와 만났다. 당시에 비해 지금(상단 사진)은 더 자유로워진 모습이다. 장진영 기자

다큐를 제작하며 변호사 일을 막 그만둔 2년 전 전후석 감독은 한국에 와 본지와 만났다. 당시에 비해 지금(상단 사진)은 더 자유로워진 모습이다. 장진영 기자

“예전엔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 둘 사이에 고민했는데 점차 재미 한인이란 정체성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후 중국 옌벤에 가서 조선족 친구들을 처음 만나고선 이들이 중국·한국·북한 사이 갈팡질팡하는 이중, 삼중의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걸 알았다. 자원봉사·일로 세계를 다니며 고려인·탈북자·입양아·혼혈·한인 친구들을 만나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난민들 중 그들 나라 헤로니모 있죠

아내 크리스티나(왼쪽)와 생전 헤로니모 임 부부의 모습이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아내 크리스티나(왼쪽)와 생전 헤로니모 임 부부의 모습이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전 감독은 “세계 어떤 인류사, 영웅을 봐도 다문화와 여러 정체성이 충돌하는 곳에서 평생 씨름하며 자란 사람들이 현재를 초월할 수 있는 혁신을 제공한다”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도 다양성이 혁신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경쟁이 많잖아요. 특히 학생들은 다 좋은 대학을 위해 달려가요. 미국도 일부 엘리트 스쿨은 그렇지만, 모두가 이렇게 피 튀기며 대학 가려고 경쟁하진 않거든요. 이건 다양성의 결여, 획일성의 문제죠.”    
 쿠바 동지들과 함께, 젊은 시절의 헤로니모 임(아래 맨 왼쪽). [사진 커넥트픽쳐스]

쿠바 동지들과 함께, 젊은 시절의 헤로니모 임(아래 맨 왼쪽). [사진 커넥트픽쳐스]

또 이런 다양성의 결여는 “예멘 난민에 대한 집단적 공포감, 탈북자나 재외동포, 다문화에 대한 태도로도 드러난다”면서 “우리가 정의하는 한인의 범주를 넓히고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 필요하다. 난민들 중엔 그들 나라의 헤로니모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헤로니모는 쿠바인으로 자라며 젊어선 혁명에 이바지했고 나중엔 한인의 역할을 했잖아요. 결국 헤로니모의 상징성은 애국주의나 ‘국뽕’,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아니고 인본주의죠.”
 

안창호 선생 후손, 강경화 장관도 호평 

혁명정권이 무너진 지금은 상대적 빈곤이 쿠바 한인들을 덮쳤다. 현지인과 더불어 살며 외모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김치며 한국식 볶음밥을 해먹는 순간순간이 가깝게 느껴진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혁명정권이 무너진 지금은 상대적 빈곤이 쿠바 한인들을 덮쳤다. 현지인과 더불어 살며 외모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김치며 한국식 볶음밥을 해먹는 순간순간이 가깝게 느껴진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저희 부모님 같은 한인 선구자들의 이야기라 매우 뜻깊다.” LA 상영회에서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씨가 뭉클한 목소리로 전한 감상평이다. 작은 다큐 ‘헤로니모’가 확보한 스크린은 50개 남짓. 그럼에도 1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개봉 규모치곤 고무적인 성과다.
전 감독은 영화를 완성한 지금 디아스포라의 역할과 가능성을 더욱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변호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더라도 이 일을 더 파고들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앞으로 더 다양해지면 다양해지지 덜 다양해지진 않아요. 또 통일문제가 우리 시대 사명이고 대의라면 그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역할을 젊은 층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사는 곳이 뉴욕이거든요. 향후 2~3개월은 미국 여러 도시와 한국학이 있는 대학에서 학생·교민들과 대화하며 다음 행보를 고민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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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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