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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와해' 삼성 임원 실형···英소설 '어려운 시절' 인용 왜

중앙일보 2019.12.13 18:35
삼성 에버랜드 노동조합 와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이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업무방해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에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 받았다. [뉴스1]

삼성 에버랜드 노동조합 와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이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업무방해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에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 받았다. [뉴스1]

"21세기에 사는 피고인들이 19세기 소설 속 인물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가"
 

"피고인들, 찰스 디킨스 소설 속 인물 같아"
노조와해 혐의, 강경훈 삼성 부사장 징역형
손동환 부장판사 "노동 3권은 사회의 약속"

13일 손동환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형사 33부)는 삼성 에버랜드 노조 와해 혐의로 기소된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55)과 이모 에버랜드 전무 등 삼성그룹 직원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1854년 출간한 소설 『어려운 시절』을 언급했다. 
 

노조와해 혐의 강경훈 부사장 실형 

이날 재판부는 강 부사장과 이 전무에게 업무방해·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각각 징역 1년 4월과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그외 삼성에버랜드 노조원의 개인 동향을 파악하고 어용노조 설립에 관여한 직원들에겐 모두 1년 이하 징역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실형을 선고받은 강 부사장과 이 전무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법정구속하진 않았다.
 
법원은 삼성그룹이 과거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그룹의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려 에버랜드 노조 와해 작업에 조직적 개입을 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실형을 선고받은 강 부사장은 두 눈을 감은 채 재판 결과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시절' 표지 [창비]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시절' 표지 [창비]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왜

손 부장판사는 이날 재판에서 양형이유를 설명하며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손 부장판사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목적이 말 여섯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사슴고기를 먹는 것이라 (귀족들이) 떠벌리는 구절이 있다"며 "21세기에 사는 피고인들이 19세기 소설 속 풍자 대상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노동자는 헌법상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실제 소설『어려운 시절』에는 19세기 중반 자본주의 초기 노동운동에 대한 귀족들의 비난과 이를 허위의식이라 규정하는 디킨스의 풍자가 담겨있다. 
 
소설 속 귀족 부인인 스파시트는 노동자들을 '그 따위 계급'에 비유하며 당시 빵 한조각도 구하기 어려웠던 노동자를 "황금수저를 갖고 자라수프와 사슴 고기를 먹으려 한다"며 제거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지난해 9월 27일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김수현 당시 공공형사수사부 부장검사가 삼성그룹의 노조와해 공작 수사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9월 27일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김수현 당시 공공형사수사부 부장검사가 삼성그룹의 노조와해 공작 수사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세기 피고인, 19세기 사고했다" 

재판부가 노조를 와해하려 한 강 부사장 등 삼성그룹 직원들을 이 귀족 계급과 유사한 사고를 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재판부는 삼성 측 변호인이 "일부 (노조와해 작업)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성됐고 피고인들은 무노조 경영이란 회사지침을 수행하는 수동적 행위를 한 것"이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삼성그룹의 노조 와해 시도가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연속해 이어졌기에 이 기간 모든 범죄가 하나의 행위로 묶이는 포괄일죄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봤다. 이럴 경우 2011년이 아닌 가장 늦은 시기(지난해)에 행해진 범죄를 기준으로 업무방해죄 등의 공소시효(7년)가 적용되게 된다. 
 

"노조와해로 고통받는 동료들 있어"  

변호인이 회사 지침을 따른 '수동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선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자신의 행위로 고통받는 동료들이 있었음에도 (노조를 설립하려는 직원들을)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로 보며 노조 설립을 막고 에버랜드의 건강한 노사관계 발전을 막았다"고 판시했다. 
 
피고인들이 노조를 설립하려는 직원들의 동향 및 비위를 사찰해 수사기관에 고발하는 등 탄압하고, 노동자 중심의 노조설립을 막으려 어용노조를 설립한 것에 대해 모두 '중대한 범죄행위'라 판단한 것이다. 
 
17일 선고가 예정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공작'에 개입 혐의 재판에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이 지난 11월 5일 검찰의 4년 구형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선고가 예정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공작'에 개입 혐의 재판에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이 지난 11월 5일 검찰의 4년 구형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법조계에선 이날 재판부 결과로 17일 선고 예정인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혐의 재판의 피고인인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 대한 실형 선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한다. 삼성그룹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강 부사장은 이 재판에서도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상태다. 
 
이날 선고 결과가 나온 뒤 재판에 참석했던 삼성 에버랜드 해고 노동자 이모씨 등은 고무된 얼굴로 기자들에게 "재판부의 선고 형량이 너무 낮다. 절반의 승리라 생각한다"고 소리쳤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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