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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투병 공개 한 달, 백건우의 쇼팽은 흐느끼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9.12.12 14:58
11일 쇼팽의 12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11일 쇼팽의 12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11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만석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73)의 쇼팽 공연. 아내인 윤정희 배우의 알츠하이머 소식을 세상에 알린 것은 지난달이었다. 한달 만에 한국 무대에 선 백건우는 쇼팽의 12곡을 골라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 감상적이라 알려진 밤의 음악 녹턴 6곡, 쉽고 단순하게 여겨지는 왈츠 3곡에 즉흥곡, 폴로네이즈, 발라드였다. 아내가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고백 뒤에 이어진 낭만주의 작품 연주였다.  
 

11일 '백건우와 쇼팽'서 굳건한 쇼팽 선보여
아내 윤정희 알츠하이머 투병 공개 후 한달 만

예상을 깨고, 백건우의 쇼팽은 담백하고 굳셌다. 첫 곡이었던 즉흥곡 2번부터 페달을 덜 밟아 울림을 줄였다. 음표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들렸다. 감정의 자유로운 전개를 담은 음악이었지만 백건우의 쇼팽은 그보다 형식에 충실한 쪽을 택했다. 공연 전반부의 중심 작품이었던 환상 폴로네이즈에서 백건우는 담담하게 첫 부분을 열었다. 건조하다 싶을 정도의 시작이었다.
 
환상 폴로네이즈 자체는 장엄하고 다소 비극적이기까지 하지만, 백건우는 다음 부분으로 음악을 이끌고 갔을 뿐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지 않도록 했다. 감정이 증폭되는 부분에서도 일정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소리의 크기와 색채를 조절했다. 특히 쇼팽 특유의 장식적인 음들조차 백건우의 연주에서는 정확하게 박자대로 진행됐다. 감상적이기 쉬운 부분도 뚜벅뚜벅 흘러갔다.
 
연주자의 개인사와 얽힌 서정적 멜로디와 해석을 기대한 청중이었다면 의아했을 연주였다. 하지만 백건우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는 명확했다. 환상 폴로네이즈 후반부 화음이 트릴(두 음을 반복하는 것)로 이어지는 부분을 백건우는 강렬하게 폭발시켜버렸다. 어떤 피아니스트도 이 부분을 이처럼 격돌하듯 표현한 적은 없었다.
 
흔히 연주되는 쇼팽이 흐느끼는 모습이었다면 백건우의 쇼팽은 강렬한 감정으로 충돌하는 인간이었다. 쇼팽의 음악에서 아름답게 이어지는 멜로디만 강조하는 것은 오류이며, 묘한 색채로 쌓여있는 화음이 뼈대라는 점을 보여줬다. 화음의 여운은 선율보다 길었다.
 
11일 백건우가 연주한 쇼팽은 담담하고 강했다. [사진 빈체로]

11일 백건우가 연주한 쇼팽은 담담하고 강했다. [사진 빈체로]

이날 마지막 곡이었던 발라드 1번에서도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화음이었다. 여러 음이 쌓아 올려져 함께 울릴 때 모든 음은 고르고 명확하게 들렸다. 쇼팽은 흔히 서정적 멜로디로 기억되지만, 백건우의 쇼팽만큼은 입체적 화음의 향연이었다. 공연 후에 만난 백건우는 “쇼팽의 정수는 화음이고 내가 늘 연구하는 것도 화음이다”라는 말로 이날 연주를 설명했다.
 
백건우는 이날 피아노 위에 악보를 놓고 연주했다. 보통 피아노 독주회는 악보로 연주하는 것과 다르다. 백건우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을 연주하는 독특한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그간 악보를 외워서 연주해왔다. 그는 지난달 인터뷰에서 “이때까지 음악하고 너무 싸웠던 것 같다. 이제 스트레스 없이 음악을 하고 싶다. 웬만한 건 악보 보고 치려 한다”고 했다. 악보 앞에 앉은 그는 오랜 시간 연구하고 해석한 한 작곡가의 모습을 자유롭게 풀어냈다. 고통에 떠밀려 감상적이 되기보다는 내면에서 강렬하게 고민했던 쇼팽의 모습이었다.  
11일 공연이 끝나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11일 공연이 끝나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한 시대를 대표했던 배우의 투병 소식에 많은 청중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백건우의 위로는 새로운 차원이었다. 
백건우는 이날 독주회와 같은 프로그램을 지난해 이탈리아 볼차노, 올해 3월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연주했다. 그가 쇼팽의 내면을 전하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작품의 배열이다. 같은 레퍼토리로 연주되는 백건우의 쇼팽은 14일 경남 김해, 15일 경남 양산 통도사, 19일 강원 강릉, 20일 경기 오산에서 계속된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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