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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어택] 내게 편한 길과 세상에 필요한 길

중앙일보 2019.12.12 00:13 종합 33면 지면보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2003년 1월 초, 실업배구 겨울리그(프로배구 출범 전이다)가 열리던 지방 체육관에서 한 감독과 마주쳤다. “그 녀석 정말 물건이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본 건 처음인데. 너무 탐나.” “누군데요.” “경북사대부고 3학년 되는 짝배기(왼손잡이)인데. 걔 데리고 가면 대학배구 평정이야.” “그 정도면 (스카우트) 끝났겠네요.” “다들 입질만 했지 미정이래.” 대구로 향했다. 한국 남자배구 간판 공격수 박철우(34·삼성화재)를 처음 만난 게 그때다. 학교 감독은 “체육관 천장이 낮아 철우가 힘들어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키 자랑이었다. 당시 2m1㎝라고 했다.
 
2004년 박철우는 대학 진학 대신 실업팀(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이듬해 프로배구가 출범했다. 현대캐피탈은 77연승의 삼성화재 ‘왕조’를 무너뜨렸다. 박철우는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시련도 있었다. 기흉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 ‘덕분’에 치료받던 병원에서 부인(전 여자농구 선수 신혜인)을 만났다. 2010년 장인인 신치용(현 진천선수촌장) 감독의 삼성화재로 이적했다. 그리고 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박철우는 왼손잡이다. 배구에서 왼손잡이의 포지션은 제한적이다. 세터 또는 라이트다. 왼손잡이 레프트나 센터는 드물다. 이유가 있다. 세터는 센터와 라이트 사이에 선다. 세터와 각 포지션 간 거리를 비교해보자. 레프트나 센터는 왼팔보다 오른팔이 세터에 더 가깝다. 공의 체공시간이 길면 블로킹에 막힐 가능성이 커진다. 라이트는 반대다. 왼팔이 세터에 더 가깝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라이트가 제격이다. 장윤창이, 김세진이, 박철우가 그랬다.
 
평생 라이트로 살아온 박철우가 올해 센터 변신을 자청했다. 지금도 라이트로 뛰면 경기당 20~30점도 거뜬하다. 반면 센터에선 초라하다. 그래도 그가 센터로 옮긴 덕분에 팀은 외국인 라이트를 구했다. 외국인 레프트는 드물고 비싸다. 낯선 자리는 편하지도, 빛나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게 편한 길 대신 팀에 필요한 길을 택했다. 처음 만난 지 17년, 지금의 박철우는 그때보다 한참 더 커 보인다.
 
장혜수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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