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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라

중앙일보 2019.12.10 00:3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은 15만 평양 군중이 운집한 능라도 5·1경기장에서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산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반도에서 더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평양 시민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연말 다가오며 한반도 위기감 고조
이대로면 비핵화 협상 파국 불가피
김정은과 트럼프의 오판 막으려면
문 대통령 정신 차리고 적극 나서야

돌이켜 보면 정말 꿈만 같을 것이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시작해 판문점, 평양, 백두산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남북 정상의 화해와 평화의 행보는 가슴 벅찬 명장면들을 남겼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도보다리 대화가 그렇고, 천지를 배경으로 손을 맞잡은 남북 정상의 백두산 동반등정이 그랬다. 어느새 지금은 빛바랜 사진 속 희미한 추억이 됐다.
 
옛날 중국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실수로 칼을 물에 빠뜨렸다. 얼른 그는 그 위치를 뱃전에 표시했다. 그러면 나중에 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사성어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유래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이다. 북한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문 대통령의 저자세 대북정책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가 각주구검이다. 뇌리와 심장에 각인된 도보다리와 능라도 경기장, 백두산이 종종 그의 현실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 같다.
 
북한은 올해 들어 13번이나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초대형 방사포 등 온갖 신형무기를 쏘아댔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한 번도 육성으로 북한을 나무란 적이 없다. ‘넓은 오지랖’을 탓하고,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는 무지막지한 조롱에도 묵묵히 참고 듣기만 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탈북자를 북한이 요청하기도 전에 돌려보내기도 했다. 금강산 내 남측 관광시설을 뜯어내겠다고 하는 데도 정부는 되레 금강산 관광지역을 원산 갈마지구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한다. 북한은 남북 군사 분야 합의를 대놓고 위반하는 데도 우리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존공영을 바라는 문 대통령의 간절한 소망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북한을 달래면서 미국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옹색한 처지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세상일은 기대와 소망만으로 되지 않는다. 냉철한 현실 인식과 주도적 전략이 없으면 끌려다니기 마련이다. 대통령이 꿈을 꾸고 있으면 깨워서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것이 참모들의 역할이지만,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셈법을 바꾸라고 요구하며 제시한 연말 시한이 다가오면서 한반도에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한동안 뜸했던 미국과 북한의 거친 말싸움이 재연되고 있다. 영구 폐기를 약속했던 동창리 엔진시험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했다면서 북한은 트럼프를 압박하고 있다. 탄핵 정국 돌파와 재선이 급한 트럼프는 안절부절이다. 전임자와 대비되는 외교 치적으로 내세워온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와 핵실험 중단 조치가 수포로 돌아가면 내년 대선에 악재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선거를 앞두고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나아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어떻게든 김정은이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옥죄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벼랑 끝에 몰리기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압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양보 없이 버틴다면 김정은으로서는 위성 발사를 가장한 장거리 로켓 발사든 ICBM 시험 발사든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다.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기 때문에 트럼프로서도 강력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엔 안보리는 대북 추가제재에 나설 것이고, 한반도에는 또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남북한과 미국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다.
 
트럼프가 워싱턴 시각으로 한밤 중에 문 대통령에게 먼저 전화를 해 30분 동안 이 문제만 논의했다는 것은 그만큼 트럼프가 다급하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나서서 김정은을 좀 말려달라고 긴급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서 ‘스몰딜’이라도 성사시켜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미국이 주장해온 전부 아니면 전무 식 ‘빅딜’은 현 단계에서 비현실적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최종 목표라는 대전제 아래 북한의 모든 핵 활동 중단과 경제제재 일부 완화를 맞바꾸는 선에서 첫 단계 딜을 성사시킨다면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은 다시 주목받게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이 그 역할을 하려면 일장춘몽의 아련한 꿈에서 우선 깨어나야 한다. 각주구검의 과거지향적 사고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집무실과 연결된 핫라인부터 가동해야 한다. 필요하면 판문점에서 원포인트 담판도 해야 한다. 냉철한 논리와 강한 어조로 김정은의 오판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소극적 태도로는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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