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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비밀은 깊이 묻을수록 폭발력이 크다

중앙일보 2019.12.10 00:29 종합 27면 지면보기
강민석 콘텐트제작에디터

강민석 콘텐트제작에디터

문재인 정부 이전, 꽤 오래전의 일이다. 청와대 A 민정비서관과 서울 광화문의 한 중식당에서 저녁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핵심 경제부처 B 차관의 비위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민정비서관은 만나기 힘든 공직자다. 만난 김에 넌지시 “B 차관 얘기를 들었느냐”고 물어봤다. 그러곤 내가 들은 얘기를 쭉 설명했다. 민정비서관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유재수 감찰, 묻힐 줄 알았을까
사정라인, 다시 되새겨 봐야 할
노 전 대통령 ‘다이너마이트론’

“되긴 뭐가 됐습니까! 기사를 쓴다잖아요!” 통화 상대가 B 차관이었음을 그의 언성이 커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청와대 비서관은 대개 1급 공무원이다. 차관보다 서열이 아래다. 당시 통화 분위기는 달랐다. 민정비서관은 이미 B 차관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검찰도 아니고, 경찰도 국정원도 아니었고, ‘감사원’의 감찰정보를 통해서였다. 민정비서관이 얼마나 다양한 루트로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지 감이 왔다. 하지만 민정비서관의 진짜 파워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이틀 뒤였다.
 
다음 다음날 B 차관이…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모를 뿐이지, 상당수의 고위 공직자들이 이런저런 사정기관의 감찰 활동을 통해 사직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눈으로 목격하고 체감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최근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에 대한 감찰 무마 의혹 사건을 접하니 예전 일이 떠올랐다. 얼핏 보면 유 전 부시장 사건도 당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사정기관의 감찰망(청와대 반부패비서관실 특별감찰반)에 포착됐다는 점, 민정비서관(백원우)이 사표를 받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서 조용히 마무리했다는 점…. 하지만 B 차관 건은, 자세히 공개하긴 어렵지만, 수사 의뢰할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반면 유 전 시장 건은, 나중에 재판 결과를 봐야겠지만,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시절 업체 관계자들로부터 각종 편의와 자녀 유학비, 항공권까지 받았다는 내용이었으니 B 차관 건 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그런데도 감찰로 얻은 정보의 처리는 B 차관과 동일했다.
 
서소문 포럼 12/10

서소문 포럼 12/10

민정비서관이 청와대 비서관 중에서도 가장 파워풀한 자리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마 사정(감찰) 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백원우 민정비서관실은 각종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것과는 별개로 자체 감찰반까지 운영(반부패비서관실과는 별도인)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사정기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백원우 민정비서관이 처음으로 직원들과 함께 청와대 인근에서 회식한 게 2017년 6월 6일이었다. 백 비서관은 1차를 주재하고, 2차에선 빠졌다. 그런데 ‘백원우 비서관이 비서관실 직원들과 함께 회식했는데 참석자는 누구고, 비용은 얼마고, 결제 방식은 뭐다’라는 아주 디테일한 내용이 이틀 뒤인 6월 8일, 검찰에서 만든 ‘동향보고’ 문건에 담겼다. 이 동향보고 문건이 민정비서관실에 들어왔다. 백 비서관이 이걸 보고는 ‘수사 기관이 청와대를 사찰한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민정비서관실에 자체 감찰팀을 만들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감찰과 관련한 활동은 속성상 비밀스럽다. 감찰 정보의 수집이나 수집된 정보의 처리 모두 한동안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외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욱 감찰권의 행사에 신중해야 하고, 처리는 엄정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의 민정라인은 유재수 전 부시장의 비위는 ‘금융위원회’에 ‘통보’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김기현 전 시장의 경우(동생의 건설업자 유착 의혹)는 ‘수사기관’에 ‘이첩’했다. 똑같은 비위 첩보에 처리가 달랐기 때문에 오늘의 논란이 커진 측면이 없지 않다. 만약 유재수 전 시장 첩보를 입수했을 때 즉각 수사 의뢰(최소한 수사기관에 이첩)했다면, 청와대는 지금쯤 “모든 비위 첩보에 대해 똑같이 엄정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밀주의는 신봉할 게 못 된다. 지난 2005년, 이전 정부 국정원의 도청사건이 사실로 확인됐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내부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는 깊이 묻을수록 폭발력이 크다.”(윤태영 『대통령의 말하기』)
 
깊이 묻어둘수록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역풍이 걷잡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다시 생각해볼 말이다. 감찰을 통해 손에 쥔 첩보를 다이너마이트 다루듯 조심스럽게 취급했다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강민석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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