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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에 180만원, 대기 시간만 5년…괴짜 천재가 만든 컬트 와인

중앙일보 2019.12.09 10:50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을 만든 괴짜 천재 와인메이커 제이슨 우드비릿지.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을 만든 괴짜 천재 와인메이커 제이슨 우드비릿지.

와인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올해 와인 평론가로서 공식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남긴 리뷰와 점수(파커 포인트·PP)는 여전히 와인 업계를 좌우한다. 50점부터 100점 사이 점수로 와인을 평가하는 파커 포인트는 여러 쟁점에도 불구하고 업계와 소비자가 공히 인정하는 기준으로 통한다. 그런데 2003년부터 지금까지 파커 포인트 100점을 22번이나 받으면서 최단 시간 최고 기록을 세운 와인이 있다. 바로 미국의 컬트 와인 ‘헌드레드 에이커(Hundred Acre)’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등장한 ‘컬트 와인’이란 단어는 소량 생산되는 고품질의 와인을 뜻한다. 숭배를 뜻하는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한 말로,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한정된 양만 생산되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높은 것은 물론, 엄청난 대기 리스트를 자랑한다.   
헌드레드 에이커의 연간 생산량은 1만2000병뿐이다. 매년 3000명 이상의 대기 리스트가 작성되는데 이름을 올리고도 5년 후에나 받을 수 있다. 와인 한 병의 가격은 180만원 이상. 빈티지에 따라 한 병에 400만원 이상도 호가한다.  
로버트 파커로부터 ‘월드 프리미어 컬트 와인메이커’라는 극찬을 받은 헌드레드 에이커의 주인은 제이슨 우드브릿지(Jayson Woodbridge)다. 1998년 미국 나파밸리 지역에 와이너리를 설립한 그는 진흙이 주를 이루는 자갈 점토질 토양에서 포도를 키우는데, 100% 카베르네 쇼비뇽으로만 와인을 만든다. 포도가 자라기 힘든 땅에서, 그것도 100% 카베르네 소비뇽만으로 최상급 와인을 만든 주인공. 업계에서 그를 ‘와인 업계의 천재 또는 이단아’라고 부르는 이유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22번이나 받은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 브랜드 명은 만화 '곰돌이 푸'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상상 속의 마을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따왔다. 레이블에 그려진 5개의 별은 우드브릿지의 자녀들을 그려넣은 것이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22번이나 받은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 브랜드 명은 만화 '곰돌이 푸'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상상 속의 마을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따왔다. 레이블에 그려진 5개의 별은 우드브릿지의 자녀들을 그려넣은 것이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도 ‘왜 100%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만드는가’ 였다. 그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따로 블렌딩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완벽한 포도품종”이라며 “현재는 다른 포도품종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로만 사용되는 추세라 정말 순수(Pure)하고 완벽(Perfection)에 가까운 카베르네 소비뇽 100% 와인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때문에 나는 더더욱 완벽에 가까운 순수한 카베르네 소비뇽 100%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순수’ ‘완벽’이라는 단어들이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 와인 메이커인지 단번에 캐릭터를 설명해줬다.      
투자은행에서 펀드매니저로 근무했던 우드브릿지가 돌연 와이너리 사업에 뛰어든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어린 시절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이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좀 더 가정에 충실한 동시에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찾기 위해서다. 둘째는, 몇 년 전 우연히 들렀던 캐나다 와인 산지 오카나간의 와이너리에서 오래 알고 지낸 듯 편안함을 느낀 후 언제고 와인을 만들어보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부동산업체처럼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브랜드 명도 알고 보면 ‘곰돌이 푸’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따온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만드는 와인이 누군가의 ‘상상 속 또는 마음 속 공간’이 돼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실제로 그는 “와인은 쉼터가 돼야 한다”며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따는 순간은 보석 상자를 열 때처럼 흥분되고, 와인을 마시는 순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 돼야 한다. 그냥 좋은 와인과 정말 좋은 와인의 차이는 얼마나 큰 행복한 경험을 주느냐로 갈린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행복을 선사하고픈 그는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괴팍할 정도로 엄격하다. 4개의 싱글 빈야드에서 키운 포도 수확 시기는 ‘아주 달콤하고도 고급스러운 탄닌감’을 얻을 수 있는 시점인데, 이는 그만의 집념과 노하우로 얻은 결과다. 그는 포도를 수확할 때도 포도송이 째 따는 게 아니라 한 알 한 알 제대로 익은 것만 일일이 손으로 거둔다. 그 다음 아주 천천히 저온숙성 시키는데 와인이 오염될까봐 28개월 동안 배럴을 옮기는 작업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를 재울 때처럼 최상의 컨디션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주기 위함”이라는 게 이유다. 그는 자신이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K2 정상에 오를 때처럼 아슬아슬한 작업”이라며 “모든 나의 경험치를 총 집약한 일이라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어 정말 외로운 작업”이라고 했다.    
우드브릿지의 이 특별한 열정 덕분에 헌드레드 에이커의 와인들은 수많은 와인 평론가들 사이에서 ‘아주 진하면서도 호화롭고 크리미한 질감을 선사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매년 대기 리스트는 늘고 있지만 그는 단순히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자신의 와인을 맡기진 않는다. 좀 더 여러 나라의 와인 매니아들과 자신의 와인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씩 쪼개서 현재 전 세계 3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은 아영FBC에서 작년부터 수입하고 있으며, 올해는 딱 80병만 국내에 들어왔다.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 메이커 제이슨 우드브릿지. 그는 일반적인 업계의 불문율이나 관습 따위는 제쳐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열정을 다하는 캐릭터다. 그가 '천재이자 괴짜 와인 메이커'로 불리는 이유다.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 메이커 제이슨 우드브릿지. 그는 일반적인 업계의 불문율이나 관습 따위는 제쳐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열정을 다하는 캐릭터다. 그가 '천재이자 괴짜 와인 메이커'로 불리는 이유다.

그를 인터뷰하는 날 한국은 갑자기 찾아온 추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비닐 천막을 친 야외 테이블 위 와인 잔도 차가웠다. 그러자 그는 와인이 든 잔의 불룩한 부분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감쌌다. 원래 와인 잔은 손의 열기로 데워지면 안 된다고 해서 꼭 잔의 다리부분만 잡고 마시는 게 불문율이다. 하지만 그는 “아로마가 잘 올라올 수 있도록 잔을 살짝 덥혀주자”며 “이 와인이 어떤 향기를 내게 선물할지 기대하는 시간을 즐기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의 이런 시적인 표현에는 자신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숨어 있었다. 그는 “수많은 남녀가 서로 스치지만 결국 자신을 잡아당기는 향기는 단 한 사람의 것”이라며 “만났을 때 불이 탁 켜지듯 유혹하는 향기가 바로 이 헌드레드 에이커의 아로마”라고 소개했다. 마치 마술사가 손에 쥔 작은 상자에서 향기로운 장미꽃 하나를 피워내기 위해 주문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터뷰 마지막에서 우드브릿지는 생산량을 더 늘릴 수는 없냐는 질문에 “전 세계를 돌았지만 완벽한 포도밭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산량을 더는 늘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또 “이미 완벽한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더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도전도 필요치 않다”고 했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아영F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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