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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아우슈비츠 간 메르켈, 진주만 침묵 아베

중앙일보 2019.12.09 00:04 종합 16면 지면보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6일(현지시각)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세웠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벽’ 앞에서 헌화하고 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가 함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6일(현지시각)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세웠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죽음의 벽’ 앞에서 헌화하고 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가 함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엔 자박자박 하는 발자국 소리만 고요하게 들려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취임 후 처음 아우슈비츠를 찾은 것이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선 이는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였다. 둘은 유대인의 처형장소인 ‘죽음의 벽’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묵념을 했다. 폴란드와 독일 국기가 걸린 화환 2개가 나란히 놓였다.
 

메르켈, 유대인 재단 792억 기부
진주만 공습 78주년 일본은 딴판
야스쿠니 식당에 ‘가미카제 메뉴’

메르켈 총리가 이 곳을 찾은 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아서였다. 메르켈은 관련 자료와 유물을 보존하기 위한 기금에 6000만 유로(약 792억원)를 내놓았다. 감시탑과 희생자 신발 등 과거 독일 나치의 잔학행위를 상징하는 유물 보존에 거액의 독일 예산을 기부한 것이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10년 전 재단 설립 때도 독일 정부는 같은 금액인 6000만 유로를 기부한 바 있다.
 
희생된 유대인들의 사진 앞에서 메르켈은 연설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야만적인 범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계를 넘은 범죄 앞에서 마음 깊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범죄에 대한 기억은 끝나지 않은 우리의 책임”이라면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국가 정체성의 일부”라고도 했다.
 
반면 8일 태평양 전쟁의 발단이 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78주년을 맞는 일본의 모습은 달랐다. NHK는 하와이 진주만에서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나 정치 지도자들의 발언이나 움직임은 따로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최근 문을 연 식당에서 팔고 있는 1000엔 짜리 닭고기덮밥. 가미카제 특공대 대원들을 돌봤던 식당 여주인 ‘도리하마 도메(鳥濱トメ)’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최근 문을 연 식당에서 팔고 있는 1000엔 짜리 닭고기덮밥. 가미카제 특공대 대원들을 돌봤던 식당 여주인 ‘도리하마 도메(鳥濱トメ)’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信三) 일본 총리는 2016년 12월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라면서도, 전쟁을 일으킨데 대해 “잘못했다”는 사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요즘 일본에선 과거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위안부의 강제 연행과 관련해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하는 움직임이나, 강제징용자를 ‘구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로 표현하며 강제성을 희석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가 그렇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최근 식당 하나가 문을 열었다. 1000엔 짜리 닭고기덮밥이 가미카제 특공대 대원들을 돌봤던 식당 여주인 ‘도리하마 도메(鳥濱トメ)’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잔혹한 전쟁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전쟁과 희생을 미화하는데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가 1년이 지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돈을 누가 내고 안내고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제대로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다. 해법을 찾지 못하는 건 한국과 일본이 바라보는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는 위험한 역사 수정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역사 수정주의는 외국인 혐오와 연결돼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과 폴란드처럼 한국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서대문 형무소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이는 날이 과연 올까. 한·일 두 나라 전후 세대들의 책임이 무겁다.
 
윤설영 도쿄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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