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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언제까지 ‘문송’하시렵니까

중앙일보 2019.12.06 00:33 종합 35면 지면보기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늦은 오후 들어서는 강의실에서는 어김없이 학생들의 짙은 피곤함이 배어온다. 수업 중에 행여라도 ‘미래’ ‘직업’ ‘꿈’ 같은 단어들을 무심코 말하게 될 때면 강의실의 공기가 어디론가 ‘헉’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온다.
 

‘문송’한 청년들 어둠 드리운 대학
산업화 시대 ‘두 문화’ 전통은
넘어서야 할 지난 시대 유산
기성세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학생들은 특히 ‘문송하다’는 말을 심심찮게 쓴다.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이것이 구직(求職) 전선에서 이공계열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으로 알려진 문과생들이 자조적인 의미로 쓰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 진심으로 죄송한 얼굴이다.
 
무엇보다 죄송한 대상은 미래의 직장과 사회일 것이다. 초·중·고·대학을 거쳐 평생 무려 십수 년의 짧지 않은 교육을 받았는데 사회와 직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서 죄송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더 죄송한 대상은 아마 부모 친지일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채 수년째 애어른으로 학교에 가방을 들고나오기가 맘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아마, 가장 죄송한 마음은 예전에 꿈을 꾸었던 본인들 스스로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수많은 얼굴을 교수는 물끄러미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농담처럼 흘리며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다. 전혀 ‘문송’할 필요는 없다고.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이공계의 몫이지만 핵버튼을 누를 결단, 혹은 누르지 않을 용기는 문과에서 가르치고 수련하는 것이라고. 대학이 앞으로 인생에서 무엇을 먹고 살아갈 것인지를 준비시켜주기도 하지만,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곳이기도 하다고. 그러나 여전히 학생들의 얼굴은 더욱 문송한 표정이다.
 
사실 C. P. 스노우는 이미 1960년대에 “두 문화”, 즉 인문학적 전통과 과학적 사유구조의 단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문과와 이과 두 개의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단절은 과학이 표방하고 지향하는 기술에 기반한 사회 개혁과 진보에 크나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문송’의 원조가 있다면 아마 스노우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스노우가 그 이야기를 반세기도 지난 1960년대에 했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아직도 그런 산업화 시대의 문·이과라는 기계적인 구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공부하는 사람이 코딩과 머신러닝을 알아야 하겠지만, 미학과 논리학적 소양 없이 어떻게 주변의 미추를 판단하고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궁극의 인공지능을 꿈꿀 수 있겠는가. 한국 정치와 선거를 공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수학과 통계학적 소양 없이, 데이터를 만지지 않고 수많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후보자들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그 어지럽고 다차원적인 공간을 접근조차 할 수 있겠는가. 우연찮게도 내가 가르치는 수업은 ‘계량정치분석’이다.
 
시대착오적이고 기계적인 문·이과의 구분은 사실 이를 가르치는 대학만의 책임은 아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경제부흥을 이끌 산업역군들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됐던 곳에서 전인적(全人的) 교양인의 양성은 아마 배부른 이상주의자들의 철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대학은 기업이 얼마든지 “바로 갖다 쓸 수 있는” 노동력을 공급할 전초기지였고, 우리의 국가는, 일본의 국가가 꼭 그랬던 것처럼, 대학에 그런 책임을 부과하였다. 당시의 기업은 그런 노동력이 얼마든지 급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미래의 기업과 사회가 대학으로부터 필요한 것은 이전 세대의 단편적이고 풍부한 노동력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부분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전체를 조망할 능력이 있고, 주어진 일을 넘어서 자기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기업이 필요한 전문적인 스페셜리스트를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곳이 바로 기업이라면, 미래 대학의 역할이야말로 훌륭한 제너럴리스트를 철저하게 잘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기업은 과거의 틀에 사로잡혀 학부 전공을 우대하여 사람을 뽑고, 대학은 이에 발맞추어 어제의 커리큘럼을 반복한다. 문과는 인문학 천대를 외치며 계속 ‘문송’할 것이고, 이과는 이공계 홀대를 불평하며 또한 ‘이송’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에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스스로의 존재와 꿈을 죄송해하는 곳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라는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우며 무한한 꿈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 우리의 학생들은 그렇게 대학과 기업과 사회와 국가가 공들여 지어 놓은 미로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 꽃 같은 청춘들은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 어디에나 있고, 그 고통스러운 미로를 향해 전국 초중고의 학생들은 서서히 행진하고 있다.
 
그 미로를 어디서부터 풀 것인지 해답은 없지만 누가 풀어야 할 문제인지는 확실하다. 언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인지도 확실하다. 바로 지금, 우리가, 대학과 기업과 사회와 국가가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 이 학생들의 눈을 바로 볼 자신이 없다.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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