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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12월 1일은 진실의 순간이었을까

중앙일보 2019.12.06 00:20 종합 32면 지면보기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적대적인 비아냥 중 하나가 세월호를 ‘이용’해 대통령이 됐다는 레퍼토리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이 전 국민에 생중계되면서 정부의 미숙한 대응이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현 집권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요한 정치적 공격을 감행한 끝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게 사실이다. 문 대통령도 당시 SNS에 “박 대통령이 세월호 때 관저집무실을 이용했다, 그 긴박했던 시간에 출근 않고 뭘 했느냐”며 공세에 가담했다.
 

세월호 반면교사 삼던 대통령
특감반 수사관의 비극적 선택 날
왜 공감 능력을 못 보여줬나

2년 뒤 여야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탄핵의 불이 쉽게 타올랐던 건 비선 실세 최순실(최서원)이라는 스모킹건의 등장 이전에 이미 박근혜 정권이 국민의 마음을 잃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는지 모른다. 야당이 제기한 여러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혹은 대통령이 아이들을 구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든 없든 적잖은 국민들은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듯한 지도자의 공감 능력 부재에 상처받았고, 그렇게 마음을 돌렸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이용’해 대통령이 됐다는 주장은 과할지 몰라도 세월호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는 표현은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박근혜의 세월호는 문 대통령 임기 초 훌륭한 반면교사가 됐다. 취임 7개월만인 2017년 12월 낚싯배 전복 사고가 발생하자 대통령이 나설만한 국가적 재난이 아니었는데도 문 대통령은 사고 발생 3시간 만에 국가위기관리센터를 방문하고 오후엔 관계장관회의에서 대응책을 논의했다. 다음날 수석·보좌관 회의에선 10초간 일동 묵념을 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물론 대통령이 바꿔놓은 건 아무것도 없다. 사고 발생 7시간이 아니라 52분 만에 “해경·해군이 합심해 구조작전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지만 실종자 2명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이 사고는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로 막을 내렸다.
 
결과는 같았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다. 문 대통령은 전임자가 받았던 인격살인에 가까운 비난은커녕 거꾸로 칭찬을 받았다. 일부 언론이 “역시 ‘사람이 먼저’인 대통령”이라며 대놓고 문비어천가를 부른 것도 한몫했지만, “쇼”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족과 희생자를 챙기며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이 지난 정권에서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해준 측면도 있다. 문 대통령은 그때 그렇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좋은 사람’ 이미지를 앞세워 국민들 마음을 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난 12월 1일, 그러니까 대통령 절친의 울산시장 당선을 위한 청와대 하명수사(정치공작) 의혹을 받던 청와대 ‘백원우 특감반’ A수사관이 세상을 등진 바로 그 날, 대통령은 SNS에 도올의 책 신간 세 권 이름을 나열하며 “지혜를 넓혀주고 무척 재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책을 추천한다는 건 본인의 취향과 지적 수준, 인생 철학, 그 순간의 고민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하수선한 시절 대통령이 연차까지 쓰며 사흘간 매달렸다는 책이 호불호가 갈리는 정치적 수사로 가득한 민족주의 책이라는 데에 많은 이들이 허탈해했다.
 
사실 책을 고른 안목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게 타이밍이다. A수사관이 수능 본 아이와 평생 그를 믿고 의지했을 아내를 두고 지인 사무실에 신발 한 켤레만 남긴 채 이 세상을 떠난 날 대통령은 그와 청와대에 함께 근무했던 한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신 책 홍보라는 선택을 했다. 게다가 이틀 뒤엔 노영민 비서실장, 이낙연 총리와 국무회의에 들어가며 환하게 웃는 얼굴 사진까지 포스팅했다. 책 소개를 하는 그 순간은 A수사관의 죽음 사실을 몰랐을 수도, 또 알았더라도 정치적 부담에 애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일상적 사건사고에 묵념까지 하던 과거 대통령의 행보와 사뭇 다르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이 무심한 행보는 적잖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말뿐이고 실은 내게 유리하거나 내 편인 사람만 먼저라는 ‘행간’을 노출시켰는 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과거 추천했던 『90년생이 온다』에서 저자는 진실의 순간(MOT·Moment of Truth)라는 소비자 마케팅 용어를 소개했다. 새로운 세대는 진실의 순간에 집중하는데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눈속임하더라도 결국 거짓이 드러나는 순간은 오고, 결국 정직한 제품과 서비스만 살아남는다고 분석했다. 이 진실의 순간을 알아보는 건 비단 밀레니얼만이 아니다.
 
어쩌면 대통령의 위기는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권력형 게이트가 아니라 여기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국민의 마음을 잃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 우리 모두 목격했기에 하는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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