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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나라의 틀 바꾸라는게 ‘10월 광화문’의 명령이다

중앙일보 2019.12.03 00:25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재오 전 국회의원

이재오 전 국회의원

지난 10월의 광화문은 국민 항쟁이고 국민 혁명이었다. 10월 3일과 9일, 25일, 26일 3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 없이 광화문 광장을 채웠다. 기독교 단체 주도로 열린 전국 순회 집회의 총 참여 인원은 1000만을 넘겼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함께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열렸던 촛불 집회의 참여 인원을 넘어선다.
 

수명 다한 70년 정치 ‘객토’해야
국민 주체의 비상대책위 만들어야

‘10월 항쟁’을 좌우의 대립, 진보 대 보수의 싸움으로 판단하는 건 적절치 않다. 민심을 거스르려는 정치권력과 이에 항의하는 국민의 대결이었다. 집회에 참가하는 행위를 통해 국민들 스스로 정치의 주인공이 됐다.
 
아무리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제대로 된 평가가 뒤따라야 의미를 가진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땅의 지력이 다했으니 객토(客土)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산에 올라 흙을 퍼서 논밭에 가져다 뿌렸다. 객토는 무척 고달픈 작업이다. 하지만 객토를 해야 새해에도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부자(父子)가 게으른 이웃이 있었다. 그 집은 귀찮아서 객토하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남의 집으로 양식을 꾸러 다니곤 했다.
 
정치도 매한가지다. 정치인들이 기득권에 안주하고 몸을 사리는 정당은 객토하지 않는 논밭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객토를 하지 않으면 내년 총선에선 쭉정이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한국 정치는 지력이 다했다. 건국 후 70년을 이어온 나라의 시스템이 수명을 다했다는 경고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전 정권을 수임했던 야권도 그렇고, 문재인 정권도 정치 실패의 늪에 빠지고 있다. 10월의 민심은 여고 야고 간에 정치인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지난 70년 간 제도권에서 정치를 하려면 장·차관, 판·검사처럼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이제는 그런 것 못해본 서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해 볼 수도 있지 않겠나.
 
진보도 마찬가지지만 보수는 큰 틀을 깨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보수 통합 논의가 부상하고 있다. 자유한국당·바른미래 등 기존 정당이 중심이 돼 모이는 건 광화문 국민들의 요구가 아니다. 국민들 눈에는 기존 야권 정당들 역시 구체제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국민을 정치의 주체로 등장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야권 정당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나의 ‘빅 텐트’를 형성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참여하지 않는 통합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공천도 당이 아닌 통합비대위가 전권을 갖고 해나가야 한다. 공천은 지역구마다 당원이 아닌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국민경선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선거를 치르면 통합 야당은 200석도 가능할 것이다. 각 당에서 자기 계파 챙겨주며 공천 나눠먹기를 하면 절대 못 이긴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거의 100%를 정치 신인들로 공천해 하원 577석 중 308석을 차지해 단독 과반을 이뤄냈다. 국민에게 ‘확 바꿨구나’ 하는 느낌을 주면 이렇게 승리할 수 있다.
 
총선 후 새로 복원될 정당은 당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 전권을 휘두르는 당 대표직을 없앨 필요가 있다. 미국 정당엔 한국 같은 당 대표가 없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국민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뽑도록 하자. 당원 투표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왔다. 17개 시·도를 돌면서 국민경선을 통해 가장 국민 지지를 받는 인물을 다음 지도자로 내세우자는 것이다. 당은 선거관리만 잘하면 된다.
 
더 나아가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력도 나누자. 국회도 상·하원 양원제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틀과 제도를 혁신해야 객토를 한 셈이 된다. 70년을 지켜온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위협당하고 있다. 나라의 틀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 10월 광화문의 명령이다.
 
이재오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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