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배우 꿈 키워준 나운규의 ‘아리랑’, 의원 때 찾아나섰지만…

중앙일보 2019.12.03 00:04 종합 14면 지면보기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세운 감독이자 배우다. 악덕 부호를 물리치고 정의를 찾는다는 내용의 ‘들쥐’(1927).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세운 감독이자 배우다. 악덕 부호를 물리치고 정의를 찾는다는 내용의 ‘들쥐’(1927).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00년 전 단성사에서 ‘의리적 구토’가 개봉했습니다. 1926년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상영됐고 저는 그다음 다음 해인 28년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한국영화 100년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제132화(7635)
<6> 한국영화 100년 맏형 ‘아리랑’

나운규 몸짓·표정 보며 연기 배워
해방 뒤 고교 시절 첫 오디션 합격
단장 옆방서 주역 대사 계속 연습
배우 드러눕자 단장 “네가 해봐라”

지난 10월 23일 서울 단성사 영화역사관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 한 말이다.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인사말을 요청받으니 나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5학년 때부터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따라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중에 주일학교 연극 무대에 처음 서게 됐다. 당시 유명 배우 윤정란씨가 연출한 크리스마스 성극(聖劇)에서 단역 하나를 맡게 됐다.
 
역할이 작아 단지 한마디 하고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대사가 기억이 난다. “모두 여기에 좀 와 봐. 작은 개미가 자기보다 더 큰 벌레를 등에 지고 간다.” 대략 이런 뜻의 일본어 대사였다. 어린 마음에 잘 해내고 싶어 부단히 연습했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내 삶을 바꿔놓은 것 같다. 조그맣던 신영균이 한국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게 됐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용돈이 생길 때마다 집 근처 왕십리 광무극장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어리다고 출입을 막을라치면 모자 같은 걸 뒤집어쓰고서라도 몰래 들어갔다. 특히 심영·황철·김승호 같은 유명 배우들의 연극을 빠짐없이 보러 다녔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한 장면. 개봉 당시 15만 관객이 들며 항일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한 장면. 개봉 당시 15만 관객이 들며 항일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영화를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본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1926)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한 영화지만 1945년 해방 전까지는 종종 재상영됐다. 무성영화인데도 그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일본의 검열이 극심할 때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이 깃든 영화를 만들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을 것이다. 그 정신을 제대로 기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국회의원 시절(1996~2004) 아리랑 원본 필름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아베 요시시게(安部善重)라는 일본의 영상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다” “북한에 자료가 있다” 등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97년 문화체육부 국정감사에서 한국영상자료원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과 교섭해 아리랑 원본 필름 확보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나도 일본 인맥을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아베라는 인물은 필름의 정확한 소재도 알려주지 않은 채 세상을 떠버렸다. 우리 영화계 맏형 같은 작품의 원본 필름을 여태 찾지 못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언젠가 꼭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어릴 적 나운규 선생의 영향을 받은 나는 틈나는 대로 동네 뒷산에 올라가거나 빈 창고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했다. 배우는 울림통이 커야 한다고 생각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단련했다. 일본 사무라이 액션영화를 보고 나서는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郞) 같은 일본 배우들의 칼싸움과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기회가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극단 ‘청춘극장’ 오디션에 합격하면서다. 물론 한동안 역할을 얻기가 힘들었다. 선배들 잔심부름을 하거나 창을 들고 서 있는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대원군’에서 겨우 단역을 하나 맡게 됐다. 난 어떻게든 주연급인 ‘김아지’역(양반 계급에 반기를 든 상놈)을 따내고 싶었다.
 
작전을 세웠다. 여관에서 단장이 자는 옆방에 들어가 큰소리로 김아지 대사를 연습했다. 며칠을 반복하니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던 단장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극을 올리기 열흘 전쯤, 갑자기 김아지 역을 맡았던 배우가 기관지염으로 드러눕게 되자 단장이 나를 불렀다.
 
“김아지 역할 한번 해볼 수 있겠나?”
 
“아 그럼요. 기회만 주시면요.”
 
그 자리에서 평소 갈고닦은 실력을 뽐냈다. 단장은 책상을 쿵 내려치며 환호했다.
 
“잘했네. 이런 역할은 자네 일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하니 열심히 하게!”
 
그 후로 나는 청춘극장의 주연을 도맡아 했다. 내 삶 깊숙한 곳에 연기 인생이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