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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의 일본 속으로] ‘혐한 비지니스’가 촉발한 ‘반일종족주의’ 신드롬

중앙일보 2019.12.02 00:05 종합 20면 지면보기
도쿄 대형서점에서 판매중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윤설영 특파원

도쿄 대형서점에서 판매중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윤설영 특파원

 
지난달 21일 도쿄에서 열린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기자회견엔 전·현직 기자 10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 전 교수가 쓴 ‘반일종족주의’의 일본어판 출간을 맞아 일본기자클럽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좌석은 시작 전부터 이미 꽉 차서, 회견장 밖으로도 의자를 20여개를 둬야 할 정도였다. 이들을 위해 기자회견은 문을 열어둔 채로 진행됐다.  

2주새 30만부 '1인당 1권만 판다'
"한·일 관계 좋았다면 안 팔렸을 것"
일본 3040 젊은 독자들도 많아
극우 왜곡 주장에 책 이용되기도


 
기자회견장은 뜨거웠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이해하게 됐다”, “이렇게 충격적인 책은 처음이다”는 반응도 있었던 반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생각하나”, “강제징용자들이 자유롭게 생활을 했다고 주장하는 데 그 근거는 왜 제시하지 않았나”라는 날카로운 질문도 쏟아졌다. 유튜브에 게시된 이 전 교수의 기자회견 동영상은 조회 수가 17만 뷰를 넘겼다. 평소 3000뷰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50배 이상이 몰린 것이다.
 
지난 21일 도쿄 치요다구 일본기자클럽에서 이영훈(가운데)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가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을 출간한 기념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지난 21일 도쿄 치요다구 일본기자클럽에서 이영훈(가운데)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가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을 출간한 기념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반일종족주의’는 출간 2주 만에 일본 출판계에서 ‘혐한 비즈니스’의 또 다른 상품으로 떠올랐다. 2주일 만에 30만부를 인쇄했고, 아마존재팬에선 출간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기노쿠니야 서점에선 ‘1인당 1권만 판매한다’고 알렸다. “소설도 아닌 사회과학계열 서적치고는 매우 이례적”(출판업계 관계자)이라는 평가다. 올 6월 출간된 태영호 전 북한공사가 쓴 ‘3층 서기실의 암호’도 1만부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주목할만한 수치다.
 
이 책을 출판한 문예춘추는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계열 출판사로,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 전 교수와 접촉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예춘추 관계자는 “일본어판을 내기 위해 쓴 책은 아니지만, 이 전 교수가 유튜브에서 위안부 관련 강의를 한 것을 보고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과 출판계에서 ‘한국 때리기’는 가장 잘 팔리는 소재로 꼽힌다. 특히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하면서 ‘혐한 비즈니스’는 올여름 최고조에 달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발표와 조국 전 법무장관의 논란이 있었던 지난 8~9월엔 “TV를 틀기만 하면 한국 때리기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난 9월 발행된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의 주간지 '주간 포스트'. '한국 따위 필요없다'는 제목으로 혐한(嫌韓) 발언을 담은 특집 기사를 실었다. [연합뉴스]

지난 9월 발행된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의 주간지 '주간 포스트'. '한국 따위 필요없다'는 제목으로 혐한(嫌韓) 발언을 담은 특집 기사를 실었다. [연합뉴스]

 
한 주간지 기자는 “두 달 새 한국 출장을 7번이나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나쁜 점을 부각하는 기사를 쓰면 판매 부수가 달라진다. 데스크가 한국 취재에 돈을 아끼지 않는 이유”라고도 했다.  
 
일본 출판계에선 ‘반일종족주의’ 열풍에 대해 “한·일 관계가 좋았다면 절대 팔리지 않았을 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일 갈등이 지속되면서 그 원인을 알고 싶어했던 독자들이 이 책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출판사 담당자는 “한국인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일본을 미워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해소됐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 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의 고미 요지 편집위원은 “일본에선 저자를 혐한 인사라고 여기지 않아 거부감이 적었고, 한국인이 한국인에 관해 쓴 책이다 보니 일반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것 같다. 독자가 전부 극우층은 아니다”고 분석했다. 출판사에 따르면 ‘반일종족주의’의 독자는 절반 이상이 50대 이상의 남성이고, 나머지는 30, 40대의 남성과 여성 전체가 각각 25%씩 차지한다.  
 
지난 21일 도쿄 치요다구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기자회견장 앞에서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을 판매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지난 21일 도쿄 치요다구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기자회견장 앞에서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을 판매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보수 계열의 한 언론사 간부는 “전에는 한 가지 이슈로 한·일 관계가 악화됐는데, 지금은 여러 이슈가 종합적으로 섞여 있다. 일본 사회 전반에 한국에 대한 피로감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책은 수없이 많았지만, 비정상적 한·일 관계와 타이밍이 맞았던 셈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일본에서도 엇갈린다. 아마존재팬 독자 리뷰엔 83%가 이 책에 별 5개 만점을 줬다. “역사전쟁에 무기가 되는 책“, “진실을 쫓는 작가의 자세에 감동했다”는 리뷰도 올라왔다.

 
도쿄 대형서점에서 '신간 화제의 책'코너에 진열되어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반일종족주의'. 윤설영 특파원

도쿄 대형서점에서 '신간 화제의 책'코너에 진열되어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의 '반일종족주의'. 윤설영 특파원

 
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존재한다. 고미 위원은 “논리가 명확하기 때문에 재미는 있지만, 자기주장에 맞는 사실만 가져다 쓴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언론사 간부는 “책 내용이 전부 다 틀렸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부 증언만 갖고 ‘일본의 식민지배는 매우 좋았다’는 식의 논리 비약이 심하다”면서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었을 때 한국을 어떻게 이해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 일본인 독자는 “한국에 대한 이해를 더 넓히는 게 아니라 한·일간 접점이 더 없어지지 않을지 우려된다. (과거사와 관련해) 한국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극우층의 왜곡된 주장을 강화하는데 이 책이 이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인터넷 방송인 DHC TV에서 “한국에도 이렇게 양심적인 학자가 있다. 응원해줘야 한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공동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자민당 내에서도 극우로 꼽히는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의원과 후지TV 위성방송에 함께 출연해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소녀상은 그 자체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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