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산' 네팔 구르자히말 가보니

구르자카니(2620m) 마을 목초지에서 바라본 구르자히말(7193m) 남벽. 김영주 기자
지진 후 눈사태나 후폭풍은 감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구르자히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마을까지 소리가 들리진 않았을 거다.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한복판을 관통하며 세찬 물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달 30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3650m)를 다녀왔다. 구르자히말은 지난해 10월 고(故)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유영직·이재훈 대원, 임일진 촬영 감독 그리고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찾은 산악인 정준모 씨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비운의 산이다. 조리사 등 스태프로 참여한 현지인 4명도 함께 사망해 2015년 네팔 대지진으로 인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사고(19명 사망) 이후 최악의 인명사고로 기록됐다. 유족 중 일부는 '2019구르자히말원정대' 추모탑 건립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당시 사고는 의문부호를 남겼다. 국내외 산악인이 추정하는 사고 원인은 분분했다. 구르자히말 남벽 6000~7000m에 걸린 세락(거대한 얼음 덩어리) 붕괴에 의한 후폭풍, 협곡에서 발생한 토네이도와 같은 강력한 돌풍, 빙하 아래 고인 물을 가두고 있던 둑이 터지면서 베이스캠프를 덮쳤을 것이란 추정 등이다. 다수가 세락 붕괴를 꼽았지만, 베이스캠프 주변에 얼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문을 남겼다. 또 꽁꽁 얼어붙은 세락이 무너지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무너진다고 해도 베이스캠프를 덮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지진이 발생한 날은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후 마을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려면 데우랄리(3230m·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에 오르면 구르자히말 벽이 훤히 보인다. 중간쯤 갔을 때 구르자히말 남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 10월 30일 촬영한 구르자히말 남벽(왼쪽)과 11월 1일 지진이 일어난 후의 구르지히말 남벽. 6000~7000m에 걸린 두개의 세락이 무너져 내려 커니스(눈처마)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주 기자

사면이 주저앉아 단층을 이룬 구르자카니 마을 앞산. 지진의 영향으로 보인다. 김영주 기자
술·고기·담배·여성 '4금(禁)의 영역'
베일에 가려진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를 마을 청년 셀 바두르 찬탈(21)과 함께 갔다. 그는 지난해 사고 당시 세 차례나 베이스캠프를 오갔다. 첫 번째는 원정대의 짐꾼으로, 사고 후 시신·유품 수습을 위해 다시 찾았다. 셀 바두르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야차굼바(히말라야 동충하초) 사냥꾼이기도 하다. 베이스캠프 인근 해발 3500~4700m가 그의 작업장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베이스캠프로 달려가 첫 번째 시신을 수습했다.
마을에서 베이스캠프까지는 4시간여가 걸렸다. 베이스캠프 아래 계곡 끝 지점(해발 3400m)까지 3시간, 하지만 이곳에서 가파른 언덕을 1시간가량 더 가야 했다. 언덕은 마른 풀을 잡고 두손두발로 기어올라가야 했다. 해발 3000m를 넘어 고소 증세까지 일었다.
언덕을 30분여 올라간 지점에서 셀 바두르가 멈춰 섰다. "여기가 첫 번째 한국인을 발견한 곳이다. (한국인 5명 중) 몸집이 가장 작았다"고 말했다. 주변에 무성한 마른 야생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그 자리에 놓았다. 셀 바두르는 대각선으로 수십m 발걸음을 옮겨 "두 번째 시신을 발견한 곳"이라며 "몸집이 가장 컸다"고 했다.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오는 도랑 안이었다.

지난달 30일 찾은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3650m). 길을 안내한 현지인 셀 바두르 찬탈이 베이스캠프 텐트 자리에 서 있다. 김영주 기자
베이스캠프 자리는 궁색했다. 바로 위에 절벽이 우뚝 서 있어 시야를 가렸다. 고개를 높이 쳐들어도 구르자히말 남벽은 보이지 않았다. 세락 붕괴로 돌과 얼음이 굴러떨어진다 해도 눈앞에 당도하기 전까진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년이 지났지만, 원정대의 흔적은 또렷했다. 두세평 되는 텐트 가장자리엔 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덕에 텐트를 친 만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단속한 흔적이었다. 맨 아래 텐트 자리엔 널찍한 돌 2개가 놓여 있었다. 식당 텐트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른 풀에 덮힌 7개의 텐트 자리는 마치 제주도 돌무덤처럼 보였다.

유족은 구르자히말 남벽이 보이는 언덕에 '2019 구르자히말원정대' 추모탑을 세웠다. 김영주 기자

구르자히말원정대 추모탑. 김영주 기자
전 대원이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구르자히말원정대 사고는 산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실상 '김창호원정대'는 한국 산악계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김 대장은 고(故) 박영석(2011년 작고)·김형일(2011년 작고) 대장의 뒤를 이어 알파인스타일 신루트 등반을 이어갔다. 알파인 스타일이란 셰르파(히말라야 고산 가이드)의 도움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단번에 치고 가는 등반 방식이다.
구르자히말은 김 대장이 꾸린 세 번째 '코리안웨이' 원정대였다. 김 대장은 2016년 강가푸르나(7455m)에 코리안웨이 신루트를 개척했으며, 앞서 2013년엔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무산소 완등했다. 한국은 물론 유럽·미국의 내로라 하는 산악인이 그에게서 히말라야 등반 정보를 구할 정도로 학구파 산악인이기도 했다.
강가푸르나 원정을 함께 한 산악인 최석문(46) 씨는 지난 9월 울주산악영화제 기간 중 열린 산악포럼에서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라고 했다. 김창호원정대 이후 알파인스타일 등반은 맥이 끊겼다.
구르자히말(네팔)=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