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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고 또 쪼개라…분절·파편화가 모더니티 일궜다

중앙선데이 2019.11.30 00:20 663호 18면 지면보기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24>

개념이 있어야 현상이 있다.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쓰이는 ‘개인’이란 단어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은 없었다. 서구에서 ‘개인(individual)’이란 단어는 17세기 이후 쓰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개인·원자
더 작은 단위로 나누고 재구성 시도

과학적 방법론 추구한 근대 심리학
인간 마음을 다양한 요소로 분리
바우하우스, 과학을 예술에 접목

어원은 ‘나눌 수 없다’는 ‘indivisible’이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로서 인간을 뜻하는 ‘개인’이란 단어는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즉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자율적 개인들 간의 합의에 의한 정치 권력에의 자발적 복종을 주장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독립된 ‘개인’의 개념이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루소의 ‘개인’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실천적 내용을 명확히 하며 인간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된다.
 
근대 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대에 만들어놓은 실험도구. 그는 인간의 심리를 기계로 측정할 수 있는‘단위’로 쪼갰다. [사진 윤광준]

근대 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대에 만들어놓은 실험도구. 그는 인간의 심리를 기계로 측정할 수 있는‘단위’로 쪼갰다. [사진 윤광준]

우리가 쓰는 한자어 ‘개인’ 또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단어다. 1877년 일본의 하토리 도쿠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민약론(民約論)』이란 제목으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개인’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 ‘individual’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에게 무척이나 황당한 단어였다. ‘독립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개인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낯선 단어의 번역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랐다. ‘독일개인(獨一個人)’, ‘독일자(獨一者)’, ‘일척수(一隻獸)’, ‘일체(一體)’, ‘일물(一物)’, ‘히토리(ひとり·혼자)’ 등으로 제각기 풀었다. 그중 후쿠자와 유키치가 처음 사용한 ‘독일개인(獨一個人)’이 주로 사용됐다. 일정 기간이 지나 ‘독(獨)’이 떨어져 나가고, ‘일(一)’까지 분리되면서 오늘날의 ‘개인’이 ‘individual’의 번역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의 ‘원자(atom)’는 인문사회과학에서의 ‘개인’에 상응하는 단어다. ‘atom’ 또한 ‘indivisible’처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이란 뜻을 갖고 있다. 영국의 과학자 존 달톤은 1808년 발표한 『화학의 새로운 체계(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설(atomic theory)’을 주장했다. 물리학의 발전에 따라 오늘날에는 원자를 더 작은 단위로 쪼갤 수 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물질을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고, 이 단위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달톤의 시도는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기초가 됐다.
 
네델란드 아방가르드 그룹‘데 스틸’을 주도했던 두스부르흐. [사진 윤광준]

네델란드 아방가르드 그룹‘데 스틸’을 주도했던 두스부르흐. [사진 윤광준]

현대 물리학의 ‘원자’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여겨졌던 ‘개인’ 또한 더 작은 단위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근대 ‘심리학’의 탄생이다. 1879년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의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가 ‘개인’의 심리를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겠다며 설립한 실험실이 근대 ‘과학적 심리학’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많은 미국 유학생이 분트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가 미국에 심리학과를 세웠다. 독일에는 없던 심리학과가 미국에 최초로 생긴 것이다. 일본의 유학생들도 분트 밑에서 여럿 공부했다. 일본 제국대학의 초창기 심리학과 교수였던 마쯔모토 마타타로도 분트의 제자였다. 그의 조교였던 하야미 히로시는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파견돼 한반도 최초의 심리학과(서울대학교 심리학과의 전신)를 설립했다. 후에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분트의 실험실을 그대로 흉내 내 경성제국대학 심리학실험실을 꾸몄다. 실험실 장비가 분트 실험실만큼이나 대단했다고 한다.
  
‘개인’ 단어 루소 사회계약론서 첫 등장
 
인문과학도 아니고 자연과학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초기 심리학은 ‘과학적 방법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미국 심리학 교과서가 분트의 실험실을 근대 심리학의 출발로 여기는 이유다. 오늘날 ‘미국식 심리학’과 그 영향 아래 있는 한국의 심리학이 유독 통계학만(!) 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심리통계는 인위적으로 분절화된 변인의 효율적 관리다.(안타깝게도 현대심리학에서는 분절화된 변인의 통합, 즉 ‘창조적 편집’을 통한 이론화작업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네델란드 덴하그시립미술관-헤멘터 미술관.‘데 스틸’예술가들의 작품이 잔뜩 전시돼 있다. [사진 윤광준]

네델란드 덴하그시립미술관-헤멘터 미술관.‘데 스틸’예술가들의 작품이 잔뜩 전시돼 있다. [사진 윤광준]

 
흥미롭게도 분트는 죽을 때까지 라이프치히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심리학과의 독립조차 반대했다. 인간심리는 통합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자들이 분트의 ‘실험심리학’을 근대 심리학의 출발로 여기지만, 분트가 정작 추구했던 심리학은 ‘민족심리학(Völkerpsychologie)’이다. 실험심리학적 방법론은 그의 심리학 이론 가운데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분트의 실험심리학적 방법론이 각광받은 것은 지극히 ‘모던’했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모더니티는 나누고 쪼개는 거였다!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분트는 물리학자 헬름홀츠의 조교로 일하면서 생리학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겨온 후, 그는 인간의 심리를 자연과학처럼 정확한 측정도구를 동원해 연구하려 했다. 심리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로 분리해 측정단위를 만들고, 이를 정확하게 조사한 후, 그 결과를 통합하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지과정을 주의집중이나 기억 같은 다양한 하위 요소로 쪼개고, 이를 반응시간이나 지속시간과 같은 객관적 측정방법을 동원해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과학과 기계의 발전은 쪼개고 나누는 접근방법, 즉 분절화와 파편화의 힘을 확인시켜줬다. 20세기 초반, 사람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노동과정도 나누고 쪼갰다. ‘테일러주의(Taylorism)’라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이다. 노동자의 작업과정을 작업량·동선·작업범위·노동시간 등으로 분절화하고 표준화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아울러 관리시스템도 하위단위로 나눌 수 있는 한 나눠서 체계화하고 조직화했다.
 
이 같은 급격한 ‘과학적 변화’에 당시 사회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벨트에서 기계적으로 나사 죄는 일을 하다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컨베이어벨트에 빨려 들어가는 영화 ‘모던 타임스’는 당시 사회가 이해한 모더니티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모더니티의 본질 보여준 ‘모던 타임스’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쾰른 전시회에서 무테지우스와 반 데 벨데 사이에 일어난 ‘표준화 논쟁’은 이 같은 분절화, 파편화의 ‘과학’과 ‘기계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들이 충돌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당시 어정쩡하게 표준화를 반대하는 반 데 벨데 편에 섰던 젊은 그로피우스는 ‘표준화 논쟁’이 갖는 시대정신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쾰른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뒤로 미뤄졌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오래된 이 문제와 다시 부딪쳤다. 이텐과 그로피우스 대립은 과학과 기술, 보다 구체적으로는 분절화, 파편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대립이었다. 이텐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거부를 선택했다(그의 색채이론은 분절화를 이미 수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팡질팡했던 그로피우스는 이를 계기로 과학과 기술의 완전한 수용으로 태도를 결정했다.
 
그로피우스의 전향적인 선택은 한편으로는 이텐과의 리더십 경쟁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데 스틸(De Stijl)’ 운동의 리더였던 테오 판 두스부르흐가 그를 끊임없이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두스부르흐는 바우하우스가 설립되자마자 바이마르로 옮겨와 살면서 바우하우스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려 했다.
 
‘데 스틸’은 두스부르흐를 비롯해 화가 몬드리안, 건축가 우드, ‘빨강 파랑색의 각진 의자’로 유명한 리트벨트 등이 1917년 네덜란드에서 결성한 아방가르드 그룹이다. 모든 예술가 그룹이 그렇듯, 데 스틸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주된 원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스부르흐의 특이한 성격에 기인한다. 함께 창립을 도모했던 몬드리안조차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두스부르흐와 다툰 뒤 탈퇴했다. 미술잡지 ‘데 스틸’은 1928년까지 발행됐지만 나중에는 거의 두스부르흐의 개인잡지처럼 유지됐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럽 미술사에서 데 스틸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들었고, 전쟁 바로 직전까지 함께 예술을 논했던 각국의 예술가들은 서로 총을 겨눴다. 네덜란드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다. 전쟁 기간 네덜란드는 섬처럼 고립됐고,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예술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데 스틸은 바로 이 고립의 결과물이다. 해결되지 못한 ‘표준화논쟁’이 전쟁 후의 바우하우스에서 계속됐지만, 데 스틸은 한발 앞서 그 해결책을 내 놓고 있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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