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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曰] 일본 럭비 국가대표 구지원

중앙선데이 2019.11.30 00:20 663호 30면 지면보기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기자님, 정말 죄송한데요. 그 기사 인터넷에서 좀 내려줄 수 없겠습니까. 우리 지원이가 너무 힘들어 합니다.”
 

럭비 월드컵 일본 8강 진출에 공헌
“고맙다. 감동이다” 찬사 뒤 씁쓸함

저녁을 먹던 중에 걸려온 전화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전화를 건 구동춘 선생은 2017년 8월 13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아버지는 한국 대표, 아들은 일본 대표, 우당탕 럭비 가족’ 기사에 나오는 그 아버지였다. 12년간 럭비 국가대표를 지내고 일본 혼다 팀에서 뛰었던 구 선생은 두 아들을 럭비 선수로 키웠다. 장남 지윤과 둘째 지원은 모두 혼다 소속이고, 지원은 당시 일본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럭비는 해당 국가에 일정 기간 거주하기만 하면 국적을 바꾸지 않아도 국가대표로 국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구 선생은 “중앙일보 기사에는 저희를 격려하는 댓글도 많지만 지원이 욕을 하는 댓글도 많습니다. 게다가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에 일본 우익들이 몰려가 악성 댓글을 다는 바람에 지원이가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일 양쪽에서 욕을 먹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기사의 팩트가 틀렸거나 명예훼손 소지가 있지 않다면 댓글 때문에 기사를 내릴 순 없다’는 원칙을 전한 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조언했다. 구 선생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2년이 지났다. 2019년 가을, 일본 열도는 럭비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럭비 월드컵은 대회 기간, 관중 수 등에서 축구 월드컵을 능가하는 대형 이벤트다. 구지원은 뉴질랜드·사모아·통가 등 럭비 강국 선수들과 함께 일본 대표팀에 뽑혔다. 키 1m83cm, 몸무게 122㎏의 탱크 같은 체격을 갖춘 구지원은 8명이 짜는 스크럼 맨 앞에서 상대 선수와 직접 맞부딪치는 ‘3번’(타이트헤드 플롭) 포지션을 맡고 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예선 경기에서 옆구리 부상을 당하고도 강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개최국 일본은 예선 리그 4전 전승을 거두며 사상 처음으로 8강에 진출했다. 일본 대표팀 경기의 시청률은 50%를 넘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능가하는 열기였다.
 
일본은 8강에서 세계 최강 남아공을 만나 3-26으로 졌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대회는 남아공의 우승으로 11월 2일에 끝났지만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다. 도쿄에 와 보니 더 실감이 났다. 방송과 신문·잡지에서 끊임없이 럭비 대표팀 얘기가 나온다. 구지원에 대한 일부의 비난도 찬사로 바뀌었다. “일본을 위해 끝까지 뛰어줘서 감사하다” “구 선수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구지원도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에서 응원해 주셔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구동춘 선생은 “일본인 대부분은 정치에 관심이 없이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치가 휘저어 놓은 흙탕물 때문에 꿈을 향해 정직하게 땀을 흘리는 선수들이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고 말했다.
 
럭비는 격렬하지만 신사적이고 심판 판정에 절대 복종하는 스포츠다. 일본 기업에서는 럭비 선수 출신을 선호하고 우대한다고 한다.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7인제)에 진출했지만 럭비가 여전히 비인기 종목이다. 남자 실업팀은 3개밖에 없다. 럭비 선수 출신을 우대하지도 않는다.
 
‘제2의 구지원’이 나와 일본이 아닌 한국 대표팀을 이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려면 운동 선수의 학습권이 보호받고,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운동을 잘하면 실업팀에서 뛸 수 있고, 운동을 그만두면 직장에 들어가거나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다면 왜 굳이 일본까지 가겠는가.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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