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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 돌 뚜껑이 몰래 품고 있었다…1500년 가야 무덤 미스터리

중앙일보 2019.11.28 16:46
크레인이 넓고 큰 화강암 뚜껑 돌을 들어 올리자 촘촘하게 돌로 쌓아올린 직사각형 석실이 드러났다. 1500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쬔 잿빛과 갈색 토기들이 흙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일부는 깨졌지만 일부는 잘록한 목과 단단한 받침까지 온전한 형태가 가늠됐다. 무덤 주인이 저승에서도 풍요롭고 편한 생활을 하라고 매장 때 함께 묻은 부장품들이다. 무덤 주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5세기 중후반 경남 창녕군 목마산 중턱에 조성된 이래 단 한 번도 손을 타지 않은 교동‧송현동 63호분의 내부가 이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경남 창녕 교동 가야 지배층 무덤군서
도굴되지 않은 원형의 63호분 첫 발굴
창녕 토기 뚜렷…인골 유무는 확인안돼
"가야 매장문화 등 보여줄 중요 사료"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 내부가 28일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 내부가 28일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28일 문화재청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이하 연구소)가 1500년 전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군 250기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채 처음 발굴된 63호분을 원형 상태로 공개했다. 연구소는 지난 2016년부터 고분군 가운데 세 번째로 큰 39호분(지름 27.5m)을 조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아래쪽에 조성된 별도의 63호분(지름 21m)을 찾아냈다. 나중에 축조된 39호분이 일종의 가림막 역할을 해서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 설명을 맡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정인태 연구사는 “가야 고분 특성상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고 이렇게 온전히 발굴될 확률은 0.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거대한 화강암 7개로 석실 보호 

이날 현장에선 63호분 석실을 덮고 있던 뚜껑돌 7개 중 2개를 들어 올리는 작업이 이뤄졌다. 각각 무게가 2.8t, 3.8t에 달했다. 뚜껑 돌 하나하나는 길이 2.5~3m, 너비 1m, 두께 최대 80㎝로 거대하다. 정 연구사는 “이 화강암은 인근 화왕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운반하고 무덤 위에 덮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두번째 돌 아랫부분에 붉은 색 주칠이 선명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칠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따랐다. 
28일 공개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의 뚜껑돌(개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는 모습. [사진 문화재청]

28일 공개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의 뚜껑돌(개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는 모습. [사진 문화재청]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 내부가 28일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 63호분 내부가 28일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뚜껑 돌 아래 자리한 석실은 가로 1.9m, 세로 6.4m 크기의 직사각형을 이뤘다. 내부는 남쪽부터 차례로 토기, 매장자, 토기, 순장자, 토기를 묻어 공간을 구분했다. 공간 크기로 볼 때 매장된 주인공과 별도로 순장자가 2구로 추정된다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토기는 육안으로 봐도 창녕 토기 특성이라 할 굽다리 접시와 점열 무늬,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색이 확연했다. 살포(농기구의 일종) 등 철기도 찌그러지고 녹슨 채 일부 남아 있었다. 이들 부장품과 흙을 걷어내야 아래 인골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연구소 측은 정밀한 유물 조사와 수습에 두달 이상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5세기쯤 세력 떨치다 신라에 흡수 

금관가야‧대가야 등과 함께 세력을 형성했던 비화가야는 훗날 신라에 흡수 병합되면서 남은 기록이 사실상 없다. 정확히 언제 성립되고 말살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만이 역사를 말해줄 수 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고분 조사가 시작된 이래 도굴이 극심했다는 점이다. 가야 고분은 일반적으로 돌로 무덤 벽을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뚜껑 돌(개석)을 덮은 뒤 진흙이나 작은 돌로 밀봉하고 바로 흙을 덮는 형태다. 도굴꾼은 봉분을 파 들어간 뒤 뚜껑 돌과 측벽 사이 틈새를 이용해 석실로 들어가 유물을 털어갔다. 실제로 63호분 위에 자리한 39호분은 이런 식으로 털려 내부에 남은 유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도굴꾼이 남기고 간 흙투성이 고무 대야 등이 덩그러니 뒹굴고 있었다.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비화가야 고분군 가운데 39호분은 도굴꾼에게 이미 털린 채 발견됐다. 유물은 간데없이 도굴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고무대야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창녕=강혜란 기자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비화가야 고분군 가운데 39호분은 도굴꾼에게 이미 털린 채 발견됐다. 유물은 간데없이 도굴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고무대야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창녕=강혜란 기자

비화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양쪽에 전화수화기 형태로 잔이 달린 토기. 창녕=강혜란 기자

비화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양쪽에 전화수화기 형태로 잔이 달린 토기. 창녕=강혜란 기자

이날 현장에선 62호분에서 출토된 400여 점의 유물 가운데 일부가 소개됐다. 특히 양쪽에 잔이 달린 전화수화기형 모양의 토기가 눈길을 끌었다. 6개의 잔이 달린 등잔형토기도 선보였다. 이러한 상형토기는 주로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출토되지만 창녕에서는 처음 출토됐다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를 넣고, 같은 종류의 토기를 위아래로 포개거나 열을 지어 놓는 등 다양한 매납 방식도 확인됐다.
 

도굴꾼 거쳐 간 39호분엔 고무대야만… 

63호분과 대조적인 39호분의 내부도 관심을 끌었다. 약 1.5m 길이의 큰 돌(판석)을 세우거나(양 장벽과 남단벽), 눕혀서(북단벽) 매장주체부의 네 벽을 만들었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 등 대구·경북지역과 일본 나가노의 키타혼죠(北本城) 고분 등 나가노, 후쿠오카 지역에서 확인된다. 당시 비화가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다.  
 
창녕군 가야사복원 TF팀 김주란 학예연구사는 “가야 고분 조사는 1980년대 일본의 터무니없는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본격화됐고 현재까지 발굴 성과만으로도 독자적인 사회‧문화가 충분히 입증된다”면서 “이번에 온전한 형태의 무덤이 발굴됨으로써 좀 더 정교한 장송의례와 고분 축조기술 등을 파헤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8일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군 공개 현장 모습. [사진 문화재청]

28일 경남 창녕 교동 송현동 가야고분군 공개 현장 모습. [사진 문화재청]

 
창녕=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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