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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사고, 수영장 책임" 대법 첫 판결···13살 은우가 해냈다

중앙일보 2019.11.28 15:20
6년전 서울의 한 공공수영장에서 물놀이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은 정은우(13)군이 한글을 다시 배워 편지를 쓰고 있다.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6년전 서울의 한 공공수영장에서 물놀이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은 정은우(13)군이 한글을 다시 배워 편지를 쓰고 있다.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은우가 사고를 당한 지 6년. 대법원 선고가 나온 28일 오전 10시 정은우(13)군과 어머니 이소현(47)씨는 막 등교를 마친 참이었다.
 
“만약 대법원에서 지게 된다면 저는 헌법소원도 할거에요, 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니까요” 
 
선고 전날 이씨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이렇게 말했다. 선고 당일 파기환송 소식을 들은 이씨는 “하나님께서 은우에게 정말 큰 선물을 주셨다”며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6년간 3번의 소송 끝에 처음 승소 취지의 판결을 받은 이날은 공교롭게도 은우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씨는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할 은우는 지금 학교 수업 중이다”라며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5분도 안 된 짧은 순간에 난 물놀이 사고

사고 이후 은우가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사고 이후 은우가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은우 엄마 이씨는 6년 전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3년 7월 6일 만 6세,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은우는 가족들과 서울 성동구의 살곶이 수영장으로 물놀이를 갔다. 매 시각 45분쯤 안전요원 호루라기 소리에 수영객들은 수영장 바깥으로 나왔고 매 시각 정시쯤 다시 안내방송이 나오면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물에서 나와 간식을 먹고 다시 수영장으로 들어간 은우가 성인용 풀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건 그 날 오후 5시 4분. 다른 수영장 이용객이 은우를 물 밖으로 끌어내 심폐소생술을 하고 119에 신고했다. 한동안 의식을 못찾던 은우는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뇌손상을 입었다. 병원에서는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했다. 이후 은우는 시각장애 1급과 뇌병변 3급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수영장 관리 책임을 진 성동구시설관리공단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1·2심 "수영장측 배상 책임 없다"

사고가 난 살곶이 수영장의 예전 모습. 성인용 풀과 유아용 풀이 물에 뜬 로프 하나로 나뉘어져 있다.

사고가 난 살곶이 수영장의 예전 모습. 성인용 풀과 유아용 풀이 물에 뜬 로프 하나로 나뉘어져 있다.

소송의 쟁점은 수영장측이 ▶안전관리의무를 위반했는지 ▶시설 설치ㆍ보존상 하자가 없었는지로 모였다. 사고가 난 살곶이 수영장은 가로 42m 세로 21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절반은 수심 1.2m의 성인용 풀이었고 절반은 0.8m의 어린이용 풀이었다. 성인용 풀과 어린이용 풀을 구분하는 것은 물에 떠 있는 플라스틱 부표뿐이었다. 흔히 실내 수영장에서 레인을 구분할 때 쓰는 코스 로프(course rope)다. 로프 양쪽 끝부분에는 감시탑이 있었고 그 부근에 키 재기 판이 있었다. 키가 130cm가 안 되는 어린이는 혼자 성인용 풀에 들어가지 말라는 취지다. 사고 당시 은우의 키는 113cm였다.

 
1ㆍ2심은 수영장 측의 안전관리의무 위반이나 시설상 하자로 인한 사고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수영장에는 8~9명의 안전요원이 있었다. 법원은 “서울의 다른 야외수영장과 비교했을 때 요원 수가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어 “사고 예방을 위한 안내방송이나 표지판 설치를 넘어 모든 이용객이 안전수칙을 준수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보호할 의무가 수영장측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결했다. 수영장 관리자는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기소됐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공단도 손해배상책임에서 벗어났다. 수영장에서 사고는 났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급심은 수영장 시설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씨는 "성인ㆍ어린이용 풀이 플라스틱 로프로만 구분됐을 뿐인데 ‘어린이 진입 금지’ 표지판도 없고 물속에서 아이들이 성인용 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끔 하는 안전장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입 금지 표지판은 없었지만, 키재기 판이나 안전수칙 표지판은 있었다. 법에 "성인용과 어린이용 풀을 반드시 분리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어느새 공단측은 문제가 된 수영장을 없애고 놀이터와 야구장으로 바꿨다.
 

6년 소송…글 배워 ‘대법원장’ 꿈 생긴 은우

은우가 한글을 다시 배워 대법원에 쓴 편지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은우가 한글을 다시 배워 대법원에 쓴 편지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은우가 대법원에 보낸 편지 내용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은우가 대법원에 보낸 편지 내용 [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이씨는 판결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송과 별개로 은우의 재활을 놓지 않았다. 식물인간 선고에도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사고 후 1년을 병원에서 보낸 은우는 1년 뒤 학교에 입학했다. 시력을 거의 잃고 혼자서는 움직이기 힘든 은우를 위해 엄마가 나섰다. 매일 등하교를 책임졌다. 요일별로 병원ㆍ점자교육ㆍ장애인오케스트라ㆍ체육 활동을 다녔다. 폐활량과 소근육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은우는 사고로 가족들과의 추억뿐 아니라 한글ㆍ숫자 등 배웠던 것들도 모두 잊었다. 이씨는 점자와 한글, 숫자 1을 손으로 쓰는 것부터 다시 가르쳤다.
 
2학년 때 학급 임원선거에 출마한 은우. 회장으로 뽑혔다.[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2학년 때 학급 임원선거에 출마한 은우. 회장으로 뽑혔다.[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가족들의 사랑에 은우도 밝은 성격을 잃지 않았다. 은우는 2학년 때 학급 임원 선거에도 나가 회장으로 선출되고, 5학년때는 전교 부회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지만 요즘은 엄마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훈련도 한다.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은우는 직접 쓴 편지를 대법원에 보내기도 했다. 올해 6학년인 은우는 정의롭고 공정한 대법원장이 되고 싶다는 꿈도 갖게됐다.
 

대법원, “법 위반 없다고 하자 없는 것 아니다”

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 은우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달리기 시합에 나섰다.[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 은우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달리기 시합에 나섰다.[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28일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수영장 시설에 하자가 없어 공단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하나의 수영조에 성인용 구역과 어린이용 구역을 같이 설치하고, 벽면에 수심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은 설치ㆍ보존상의 하자”라고 판결했다. 하자와 은우의 사고 사이 인과관계도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어린이는 주의력이 떨어지므로 성인용 풀과 어린이용 풀을 물리적으로 분리해 어린이가 성인용 풀에 빠지는 사고 위험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법경제학에서 미국의 핸드(Hand)판사가 제시한 기준을 참고했다. 어떤 시설에서 사고 방지를 위해 드는 비용보다 사고가 발생할 확률 및 사고 발생시 피해의 정도가 더 크다면 시설 관리자가 위험방지조치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접근법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어린이용과 성인용 풀을 같이 설치한 수영장에서 어린이가 성인 풀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수영장 관리자도 민사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대법원은 "수영장 관리자는 어린이 물놀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기준을 갖추고 위험방지조치를 취하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부모의 보호·감독 의무가 사고의 공동 원인이 됐더라도 수영장 시설 하자로 인한 책임 인정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재활활동의 하나로 클라리넷을 배우는 은우의 모습.[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재활활동의 하나로 클라리넷을 배우는 은우의 모습.[이소현씨 제공/당사자 동의없이 사진 사용금지]

대법원 관계자는 “아이가 안전한 나라,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를 바라는 부모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판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법무법인 세동)을 통해 판결 소식을 들은 이씨는 "이제 파기환송심이 다시 시작이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보면 안전수칙 등에 고쳐야 할 점이 정말 많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을 기다리던 은우는 이렇게 소망을 전했다. "우리 재판이 잘 돼서 더는 나처럼 피해 보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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