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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논설위원이 간다] “다수의견 아닌 의견분열”…역사논쟁, 자유와 책임 충돌하다

중앙일보 2019.11.28 00:30 종합 29면 지면보기

7대 6 ‘백년전쟁’ 판결 다시 보기

백년전쟁을 방송한 RTV가 방송통신위를 상대로 낸 제재 취소소송 선고 공판이 열린 지난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김명수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대법정에 앉아 있다. [뉴시스]

백년전쟁을 방송한 RTV가 방송통신위를 상대로 낸 제재 취소소송 선고 공판이 열린 지난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김명수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대법정에 앉아 있다. [뉴시스]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것 외에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판결문에 진보-보수 상반된 시각
다수는 표현 자유, 반대는 방송 책임
문재인 대통령이 13명 중 8명 임명
“법관 법률만 봐야, 입법자 아니다”

다큐멘터리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징계를 취소하라(파기환송)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1일)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종육 법무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방통위 측 변호인도 “아쉬움은 있지만, 전원합의체 판결문에 모든 게 담겨 있는데 별도 입장을 말씀드리기 조심스럽다”고 말을 아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7대 6 판결은 법률가들이 섣불리 논평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6명의 대법관(김재형, 박정화, 민유숙, 김선수, 노정희, 김상환)이 다수 의견, 나머지 6명(조희대, 권순일, 박상옥, 이기택, 안철상, 이동원)이 반대 의견을 냈다. 법조계에서는 “6대 6 상황에서 굳이 재판장(대법원장)이 캐스팅 보트까지 하며 선고해야 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 경우 대법원장이 추가 논의를 선택할 수도 있어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장판사는 “1, 2심을 뒤집는 판결이 7대 6으로 나온 것이라서 다수 의견이라기보다는 의견 분열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진보-보수 정권 때마다 반복되는 역사 논쟁에 대한 판결로 주목받은 백년전쟁 사건은 ‘갈등의 숫자’를 남겼다. 최종 해결사인 대법원도 엄존하는 현실을 보여준 셈이다. 총 81쪽의 판결문에는 역사 논쟁을 보는 상반된 시각이 담겨 있다. 어느 쪽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진보-보수 성향을 구분할 수도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그래서 반대 진영의 입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백년전쟁 판결을 되짚어 봤다.
  
4년 4개월 만의 3심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8월 21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시청자 참여채널인 RTV가 방송한 고(故)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제재 결정(프로그램 관계자 징계 및 경고와 고지 방송)을 했다. RTV가 취소 소송을 내 2심(2015년 7월 15일 서울고등법원)까지 패소했다. 이번 판결(3심)은 4년 4개월 만에 나온 것이다. 그 사이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바뀌었고, 결과는 뒤집혔다. 다큐 제작자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2일 “백년전쟁을 둘러싼 일련의 소송전은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입장을 냈다.
 
‘플레이보이’와 ‘스네이크 박’
 
시민방송(RTV)은 2013년부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프레이저 보고서’를 방송했다. [뉴스1]

시민방송(RTV)은 2013년부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 ‘백년전쟁-프레이저 보고서’를 방송했다. [뉴스1]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은 방송 내용에 대한 평가부터 달랐다. 먼저 판결문에 적시된 방송 내용 일부다.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악질 친일파(내레이션)” “반역자 이승만, A급 민족 반역자(자막)” “백인 여자들에게도 접근해 재벌 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다…미 수사관들도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했던지 기소해버렸다”(내레이션)
 
▶“박정희는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정책에 의해 수정되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및 미 기밀문서 인용) “박정희는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뱀 같은 인간이라며 ‘스네이크 박’이란 별명을 붙였다”(내레이션)
 
다수 의견은 “사실 확인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투입했고 전체적인 인상은 기존에 입론(立論)된 역사적 사실과 전제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 정도”로 봤다.  
 
반대 의견은 “무혐의 사건, 일방적 주장 등을 제작 의도에 맞게 발췌해 역사적 사실로 오인·혼동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백년전쟁 감독 등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법원은 “실체적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명백히 허위라고 볼 증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지난 6월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확정됐다.
  
“역사 논쟁 표현의 자유 보장” -  다수의견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쟁점은 방송 내용이 객관·공정·균형성과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심의 규정)를 지켰는지 아닌지였다. 다수 의견은 “역사적인 논쟁은 피할 수 없고 사회의 건전한 추진력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논쟁은 공적 관심 사안으로 표현의 자유가 넓게 보장되어야 하고, 부분적인 오류나 다소의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섣불리 명예훼손을 인정해 역사에 관한 논쟁을 막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또 “당사자 의견을 모두 반영해야 한다면 주류적 통념에 의문이나 의혹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는 방송에서 다루기 힘들다”면서 “(시청자 참여형 역사 다큐와 지상파 보도를 구분하지 않는) 일률적 제재 기준은 공정한 여론의 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방송의 역할을 과도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사자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논쟁과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외국 정부 문서 등을 근거로 한 방송 내용이 진실로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스네이크 박’ 등의 표현도 “저속하거나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할 여지는 있지만 사실 적시를 요하는 명예훼손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악의적 발췌 역사로 단정 안 돼” -  반대의견
 
반대 의견은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방송의 책임과 객관성을 강조했다. “역사 다큐 제작자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성찰해야 한다”면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선택해 기록으로 남긴 사람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굴절되기 마련이므로 서적이나 언론보도 등 자료에 기재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사실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또 “백년전쟁은 역사 다큐로서 균형 잡힌 역사적 사실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발췌한 부분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방영해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인격을 훼손하려는 악의적인 목적이나 동기에 의해 제작했다”고 판단했다. 다수 의견에 대해서도 “방송의 실체를 고려하지 않고 시청자 개개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는 방송 정도로 수준을 낮춰 봄으로써 면죄부를 부여했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 vs 박근혜 전 대통령?
 
첨예하게 맞선 사건은 판사들의 성향과 배경에도 관심을 모았다. 전원합의체 13명 중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은 8명,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은 5명이다. 원심파기 쪽에 전자가, 반대편에 후자가 다수였으나 일치하지는 않았다. <표 참조>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안철상·이동원 대법관이 반대 의견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김재형 대법관이 다수 의견을 선택했다. 김 대법관은 보충 의견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 행위에 대한 제재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자율심의 체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방송에 행정기관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기준으로 직접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진영 논리에 추종한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7대 6 판결은 우리 사회의 갈등과 화해의 잠재력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양승태 코트’에서도 5차례 있었다. 2012년 전교조 교사들이 4대강 사업 반대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이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는 공무원의 중립 의무 위반인지를 놓고 7대 6으로 처벌 대상이라고 판결한 사건이 가장 첨예했다. 부부의 이혼 사건에서 ‘유책주의 고수’(7)와 ‘파탄주의로의 전환’(6)을 놓고도 이견이 컸다.
 
우리 사회는 대법원의 이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용담 전 대법관은 “합의 판결을 선택한 이상 12대 1이든 7대 6이든 달리 생각할 것은 아니다. 다수 의견은 일단 존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법관들의 개별적인 성향에 집중되는 현상은 염려스럽다”면서 “법관들은 법률에만 충실하겠다는 생각만 해야지, 스스로를 입법자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김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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