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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이 자리를 빌어 말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2019.11.28 00:03 경제 4면 지면보기
연말연시가 되면 각종 시상식이 잇따른다. 이때 빠지지 않는 인사말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와 같이 운을 떼지만 ‘이 자리를 빌어’는 잘못된 표현이다.
 
‘빌어’는 ‘빌다’가 기본형으로 간절히 바라다, 용서를 구하다,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소원을 빌어” “잘못을 빌어라” “집집마다 다니며 밥을 빌었다”처럼 사용한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는 뜻의 말은 ‘빌다’가 아니라 ‘빌리다’이다. 시상식 등에서 자주 쓰이는 “이 자리를 빌어~”는 모두 “이 자리를 빌려~”로 표현하는 것이 바르다.
 
남의 도움을 받거나 사람·물건 따위를 믿고 기대다, 일정한 형식·이론 또는 남의 말·글 따위를 취해 따르다는 의미일 때도 마찬가지다. “남의 손을 빌어~” “추리극 형식을 빌어~” “이 지면을 빌어~” “관계자의 말을 빌어~”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때도 모두 ‘빌리다’의 활용형인 ‘빌려’를 써야 한다.
 
‘빌리다’가 올 자리에 종종 ‘빌다’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바뀐 표준어규정 때문이다. 1988년 이전엔 남의 것을 돌려주기로 하고 얼마간 쓸 때는 ‘빌다’를, 내 것을 돌려받기로 하고 남에게 내줄 때는 ‘빌리다’를 쓰도록 했다.
 
차차 둘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두 단어의 뜻을 모두 담은 말로 ‘빌리다’만 표준어로 삼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빌다’와 ‘빌리다’의 쓰임이 지금과 같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혼란이 남아 있다. 기원·축원·사죄·구걸의 의미일 때는 ‘빌다’를, 임차·차용의 뜻일 때는 ‘빌리다’를 사용해야 한다.
 
이은희 기자 lee.eunhee@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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