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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여자 아이돌의 죽음

중앙일보 2019.11.27 01:06 종합 34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설리에 이어 가수 구하라(28)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하필 절친이던 둘이다. 한 달여 전 일본 활동 중 설리의 비보를 접한 구하라는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폭풍 오열했다. 구하라도 설리처럼 엄청난 악플에 시달렸다. 전 남자친구 최 모 씨로부터 성관계 동영상 유출 협박을 받고 법정 공방을 벌인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여자 연예인에게는 치명적인 동영상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며 데이트 폭력에 맞섰지만, 정작 인터넷 실검 1위는 ‘구하라 동영상’이었다. 피해자의 고통은 알 바 없고 ‘현역 아이돌 신작 영상’을 구하기에 혈안이 된 이들이 많았단 얘기다.
 

설리에 이은 구하라의 극단적 선택
데이트 폭력 경시, 여전한 악플문화
클릭 장사 등이 빚은 ‘사회적 죽음’

비록 유출되지는 않았다지만 구하라는 일명 ‘리벤지 포르노(헤어진 연인이 복수심으로 유포하는 성관계 동영상)’의 희생자다. 그런데 ‘리벤지 포르노’란 말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 많다. ‘리벤지(복수)’라니 피해 여성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포르노’란 단어는 성범죄 아닌 가벼운 음란물로 여겨지게 한다. 연인 관계든 뭐든, 동의했든 안 했든, 이를 유출하거나 협박할 때는 성범죄가 되는 ‘이미지 기반 성폭력’‘사이버 성착취물’이라고 바꿔 부르는 게 맞다는 지적이다.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최 모 씨는 서울 강남에 미용실을 새로 열고 성업 중이었다. 협박·강요·상해·재물손괴는 유죄였으나 성범죄인 불법촬영 혐의엔 무죄판결이 나왔다. 동영상 촬영이 “명시적 동의는 받지 않았지만, 피해자 의사에 반한 걸로 보이지 않는다”는 판결이었다. 한 보도에 따르면 “구씨가 먼저 사귀자고 디엠(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냈고,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던 사이였으며, 촬영 소리가 났는데 구씨가 제지하지 않았다” 등이 무죄 판결의 근거였다. 속칭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법규가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정작 성범죄는 무죄가 되자 논란이 뜨거웠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긴 하나, 피해자만 고통 속에 세상을 저버린 비극적 상황이다.
 
얼마 전 법원은 ‘레깅스 몰카’ 무죄 판결로 논란을 일으켰다. 레깅스는 일상복이라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촬영한 이의 성적 의도가 분명하고, 촬영 당한 이의 성적 수치심도 분명한데, 성적 수치심과 상관없다니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이 의심스럽단 비판 여론이 거셌다. 2년간 상습적으로 미성년자를 불법촬영했는데도 교사 지망생이라는 등의 이유로 선처해 준 케이스도 나왔다. 교사 지망생이라면 더 엄중한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근 청와대 게시판의 “가해자 중심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해주세요” 란 청원에 일순간 22만명이 동의한 것도 이런 사례들 때문이다. 청원인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남녀가 평소)호감이라서 감형, 폭행과 협박이 없어서 무죄,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아서 감형” 등 여전히 가해자 중심적이고 가해자 선처를 남발하는 풍토를 비판했다.
 
아이돌의 죽음은 마치 내가 잘 아는 이의 죽음처럼 충격이 크다. 구하라와 설리, 2017년 종현(샤이니)까지 거슬러 가면 남녀불문 아이돌의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안타까운 상황이다. 어린 시절부터 개인의 삶을 저당 잡힌 채 무한경쟁을 내면화하는 아이돌 산업, 그중에서도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 연예인들, 여기에 아이돌을 ‘욕받이 공공재’ 쯤으로 여기는 악플문화, 클릭 장사에 눈먼 황색 매체들과 무책임한 포털.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이 또 한 번 환기하는 것들이다.
 
구하라는 빛나는 외모와 재능으로 ‘천상 아이돌’로 불렸다. 그녀가 속했던 카라는 인기가 높았지만, 비주얼에 가려 음악성이 평가절하된 그룹이기도 하다. 카라는 다수의 명곡과 함께 2000년대 후반 일본에서 걸그룹 한류를 이끈 주역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이돌 그룹의 ‘센터(메인 멤버)’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구하라가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명복을 빈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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