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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 수백만원 선납”에 요양병원 환자들 집단퇴원

중앙일보 2019.11.25 14:22 종합 16면 지면보기
지난 2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가 ‘무전퇴원, 유전입원’ 집회를 열었다. [사진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지난 2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가 ‘무전퇴원, 유전입원’ 집회를 열었다. [사진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경북 포항시에 사는 김순이(67ㆍ가명)씨는 지난 9월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암 절제 수술을 받은 뒤 곧바로 방사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자녀들이 출가하고 남편과 단둘이 살았다. 이런저런 지병을 앓는 남편이 김씨를 간병하고 끼니를 챙기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딸이 사는 대전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근처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딸이 수시로 들여다보고 항암치료 때도 동행할 수 있었다. 김씨는 거의 매일 요양병원-대학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았다. 김씨는 한달 치료비(600여만원)의 5%(약 30만원)만 냈다. 95%는 건강보험이 부담했다. 암ㆍ희귀난치질환 특례 덕분이었다.  
 

정부, 건보혜택 이중 적용 막으려
다른 병원 진료비 사후 정산 변경
목돈 없는 암환자들 떠밀려 나가

그런데 이달 초 대학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받았다. 이달부터 제도가 바뀌어 진료비 전액을 김씨가 우선 부담하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에선 “일단 본인이 100%를 내고 요양병원에서 돌려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환급받는데 3개월 가량 걸린다고 했다. 김씨의 딸 강모씨는 “월 30만원 내던 항암치료비가 갑자기 600만원으로 뛰다니 막막하다. 일단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아이 둘을 기르며 근근히 가정을 꾸려가는 형편에 매달 이렇게 큰 돈 내기가 쉽지 않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씨처럼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암 환자들의 항암치료비 부담이 일시적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선 환자 20여명이 집단 퇴원했다. 지난 21일 한 암환자 단체는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무전퇴원 유전입원' 이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문제의 발단은 이달 1일 새로운 건강보험 요양급여 규칙이 적용되면서다. 새 규칙은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요양병원에서 발급한 진료의뢰서를 지참하고 가야 건보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진료의뢰서 없이 갈 경우 건강보험 적용이 아예 안된다. 의뢰서를 들고가더라도 일단 환자가 진료비를 100% 내야 한다. 입원 중인 요양병원이 다른 병원 진료 내역을 받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일괄 심사ㆍ청구 한 뒤에 진료비를 돌려받아 다시 환자에게 본인부담금을 뺀 나머지를 사후에 정산해주기 때문이다. '전액 선납부-사후 정산'으로 바뀌었다. 돌려받을 때까지 석달 가량 걸린다. 어차피 돌려받을 돈이라지만, 수백~수천만원에 이르는 항암 치료비를 내기 어려운 환자들은 요양병원에서 떠밀려 나간다.  
요양병원 입원 중인 환자 다른 병원 진료받으려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요양병원 입원 중인 환자 다른 병원 진료받으려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대형병원, 요양병원, 정부 사이에 끼여서 환자만  피해를 보고 있다. 일단 내고 나중에 돌려받으면 되지 않느냐지만 당장 목돈이 없는 암 환자는 요양병원 문을 나설 수 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1~2인 가족이 보편화된 시대에 가족이 밥을 챙겨주고 돌봐줄 형편이 안되는 암 환자가 많다. 이들은 모텔이나 원룸을 전전하며 항암치료를 받기도 한다. 돈 없는 암환자가 마음 놓고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보호하겠다는 특례 제도를 만든 것인데 제도가 거꾸로 간다”라고 지적했다.  
 

입원 중에 다른 병원 진료? 67%가 요양병원 환자  

 
정부가 제도를 바꾼 이유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건강보험 혜택이 이중으로 적용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입원 환자 중 다른 병원 진료를 받은 환자의 67%가 요양병원 입원 환자다. 이들은 연간 47만9303건의 치료를 받고 303억4300만원을 썼다.  
 
이중규 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건강보험 제도는 원칙적으로 한 의료기관에 입원한 환자에 대한 모든 치료는 입원 의료기관이 담당하게 돼있다. 그런데 요양병원에는 일당정액제(진료량에 관계 없이 정해진 수가를 지급)가 적용된다"며 "그러다보니 입원 환자가 고혈압ㆍ당뇨병 등이 있으면 요양병원이 약을 처방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요양병원이 약값을 아끼기 위해 다른 병원에 외래 진료를 내보내 3~6개월치 약 처방을 받게 한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요양병원이 부담해야 할 치료비를 건강보험에 떠안긴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제도를 바꿨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건강보험 누수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하면서도 ‘선(先) 납부-후(後) 정산’이라는 방식으로 암 환자에게 고통을 안긴건 문제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는 “만약 요양병원이 수가를 아끼기 위해 환자들을 다른 병원에 외래 진료를 내보내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환자가 요양병원 안에서도 적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면 된다”라며 “그런데 지금 방식은 요양병원을 제어하기 위해 환자에게 관리 책임을 전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요양병원에 일당정액제로 많은 사람들이 입원해 있다보니 생기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라면서도 “다만 비용이 많이 드는 항암치료 환자들에게는 별도의 고려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예상치 못한 제도의 허점을 인정하고 있다. 복지부 이 과장은 “암 치료와 같이 특수한 경우에는 정산 절차를 간소화해 진료비 부담이 증가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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