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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호의 시선] 문 대통령, 적절한 땅에 두 발을 뒀다

중앙일보 2019.11.25 00:25 종합 32면 지면보기
신용호 논설위원

신용호 논설위원

숨통은 틔웠다.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은 다행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종료가 몰고 올 파고가 높긴 높았던 모양이다. 한·미 관계에서 최악은 피했다. 그래도 상처가 깊다. 한·일 관계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외교는 한쪽이 원하는 목표를 모두 가져가기 어렵다. 완벽한 승리보다는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소미아 게임에선 한·일은 모두 실패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마주 보고 달렸을 뿐 실용적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건부 연장’은 문재인 외교의 새로운 착수(着手)다. 실제 일본은 지소미아의 효력 유지라는 실제적 이득을 가졌지만 한국은 당장 딱히 손에 쥔 건 없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조건부 연장은 현실적인 결정
지소미아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
원칙은 갖되 유연성도 보여줘야

‘조건부 연장’을 결정했을 때 후폭풍을 예상했을 거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해 ‘의병’, ‘죽창가’로 맞서야 한다고 했던 정부와 여당이 아닌가.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린다는 비판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당장 진보 진영이 반발했다. 700여개 시민단체 연합인 아베규탄시민행동이 “이런 꼴 보자고 우리가 불매운동한게 아니다”며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국을 감쌌던 정의당도 “원칙과 일관성이 짓밟혔다”(김종대 의원)고 한다. 진보는 문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다. 보수 진영에서도 “안보 도박의 결과, 동맹의 절대 조건인 신뢰를 잃었다”(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고 비판했다. 더구나 갤럽 조사에 따르면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잘한 일’이 51%였고 ‘잘못한 일’이 29%로 종료를 밀어붙였더라도 여론 부담은 덜했다. 문 대통령은 양쪽에서 욕먹고 여론에서도 불리한 길을 택한 거다.
 
사실 유난히 일본에 강경했던 문 대통령이었다. 지소미아 이전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으로 거칠게 부딪혔다. 지난해 2월 평창에선 한·미 군사 훈련 연기를 놓고 아베와 싸우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일일이 충돌 사례를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대통령이 취임 이후 아베 총리에 공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아베가 문 대통령을 무시하다시피 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고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한때 아베 총리를 이상한 사람이라 여길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 데다 원칙주의자인 문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에 연장이 사실상 어려운 게 아니냐고 다들 봤다. 대선 후보 시절 지소미아 파기를 언급한 적이 있고, 종료 여부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엔 반도체 기업을 찾아 “반도체 제조 강국 대한민국을 아무도 흔들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예상을 뒤집었다. 청와대의 말대로 일본이 먼저 수출 규제 재검토 의향을 보였을 수 있다. 또 미국의 압박이 나타난 것 이상으로 거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도 최종 결정은 문 대통령이 한다. 여태껏 그런 압력과 고려가 없어 ‘마이 웨이’를 해온 게 아니지 않나. 이번 결정은 현실적이다. 어디다 두 발을 대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내린 결정이란 말이다. 지금까지 이 길이 맞았지만 와 보니 아니다 싶으면 접을 수 있는 것은 용기다.
 
한일의원연맹회장이자 지일파 중진인 강창일(4선) 민주당 의원을 23일 오후 국회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내년 총선 불출마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연장키로 했는데.
“한숨은 돌려놨다. 천만다행이다.”
 
문 대통령의 결정을 어떻게 보나.
“문 대통령은 원칙을 갖고 밀고 나갔다. 그러면서 유연성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한 것으로 보면 된다. 문 대통령은 원칙주의자다. 정치는 원칙만 갖고 안된다. 대통령은 국익을 생각해야 하니 융통성도 보여야 한다. 원칙주의자여도 ‘조건부 연장’ 결정은 순리를 지킨 것 아니냐.”
 
앞으로 이 문제를 풀려면.
“원칙을 지켜나가면서 국익을 제일 우선에 두고 외교정책을 펴야 한다. 지소미아 문제는 국익 문제와 원칙이 충돌되는 지점이 있다. 고뇌에 찬 통 큰 결단이었다. 한·미·일 안보 공조 체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는 매우 중요하다. 이 틀 속에서 대외정책이 나와야 하고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조건부 연장’은 문 대통령이 자주 보여줬던 모습이 아니다. 강 의원의 당부대로 앞으로도 융통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지소미아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내달 한일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갈등의 이니셔티브’를 쥔 아베와 만나면 이번엔 문 대통령이 제대로 ‘해법의 이니셔티브’를 쥐었으면 한다. 바라건대 나아가 그 유연성을 다른 분야에서도 봤으면 좋겠다.
 
신용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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