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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30점보다 이기는 1점, 박철우의 내려놓기

중앙일보 2019.11.25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박철우는 만 34세의 나이에도 외국인 선수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주 포지션인 라이트를 포기하고 센터로 변신하는 등 팀에 헌신하고 있다. [뉴스1]

박철우는 만 34세의 나이에도 외국인 선수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주 포지션인 라이트를 포기하고 센터로 변신하는 등 팀에 헌신하고 있다. [뉴스1]

‘철우화재’. 프로배구 삼성화재는 2019~20시즌 초반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베테랑 라이트 공격수 박철우(34·1m98㎝)가 24일까지 정규리그 11경기 중 8경기에서 20득점 이상 기록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공격수 못지않은 활약이다. 삼성화재는 외국인 선수 안드레아 산탄젤로(25·이탈리아·1m97㎝)가 발목 부상으로 1라운드에는 거의 뛰지 못했다. 하위권 추락이 예상됐는데, 그나마 5할 이상 승률(6승5패·승점 20)로 4위에 올라있다. 1위 대한항공(9승2패·승점 24)과 승점 4점 차다. 득점 3위(220점), 공격 성공률 3위(53.99%) 등으로 펄펄 나는 박철우 덕분이다.
 

팀 위해 변신한 삼성화재 에이스
20년 만에 라이트서 센터로 변신
경기당 20점대 거포가 2경기 4점
민폐 안 끼치고 공헌하는 게 기쁨

24일 경기 용인의 훈련장에서 만난 박철우는 “개인 기록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발목이 좋지 않아 최근 두 경기는 제대로 뛰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득점 3위에 내 이름이 있어서 신기했다. 초반에 이렇게 득점을 많이 한 건 2004년 프로 데뷔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박철우는 경기당 20득점을 기록하고 있어 산술적으로 이번 시즌 36경기에서 720득점이 가능하다. 그의 한 시즌 최다 득점은 2009~10시즌의 592점이다. 박철우는 “라이트 포지션으로 전 경기를 다 뛰어도 절대 쉽지 않은 수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박철우는 이번 시즌 센터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이트는 높이 점프해야 하고 공도 많이 때려야 하는 포지션 특성상 부상이 잦고 체력 고갈이 심해 30대 초반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월드 스타’ 김세진도 만 32세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박철우도 더는 풀타임 라이트로는 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진식 삼성화재 감독에게 “나 때문에 레프트 포지션 외국인 선수를 뽑았는데, 이제 팀에 맞는 라이트를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포지션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삼성화재 베테랑 공격수 박철우. [사진 한국배구연맹]

삼성화재 베테랑 공격수 박철우. [사진 한국배구연맹]

신진식 감독은 외국인 선수를 라이트 공격수인 산탄젤로로 뽑았다. 박철우가 센터를 맡으면 다 정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산탄젤로가 다쳤고, 박철우의 센터 전향은 미뤄졌다. 산탄젤로의 컨디션이 올라오면서 박철우는 최근 두 경기에 센터로 잠깐 뛰어봤다. 아직 네트 앞 위치 선정이나 속공 등에서 어색함이 보였지만, 4득점으로 기대감을 높였다. 박철우는 “중학교 시절 키가 커서 센터를 잠깐 한 이후 20년 만에 해본다. 배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라며 “왼손잡이 센터가 드물다 보니 주변에서 포지션 변경에 대해 걱정이 컸다. 나는 ‘라이트’ 박철우가 아닌 ‘배구선수’ 박철우로 기억되고 싶다. 팀을 위해서라면 어떤 자리든 도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철우는 센터로 변신하면서 장인어른인 신치용 진천 선수촌장 조언을 떠올렸다. 그는 “촌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팀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만 생각하라고 하셨다. ‘거기에다 욕심이나 상대와 관계 같은 것까지 고려하며 팀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우리 팀 이기는 것만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라이트로 30득점 하고 팀이 졌을 때보다 센터로 1득점 하고 팀이 이기는 게 훨씬 기분 좋더라”라며 웃었다. 삼성화재는 21일 현대캐피탈을 세트스코어 3-1로 이겼다. 이 경기에서 박철우는 1득점 했다.
 
박철우는 2010년 1월 LIG(현 KB손해보험) 전에서 50점을 뽑아 국내 선수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시즌에는 남자부 최초로 통산 5000득점을 달성했다. 센터로 뛰면서 이제 그의 득점 시계는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박철우는 “기록 욕심은 없다. 나는 다시 제로가 됐다. 팀에 민폐 안 끼치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공헌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30대 중반까지 코트에 있을 줄 몰랐다”던 박철우의 꿈은 이제 “오래오래 배구 하는 거”가 됐다.
 
“20대 때보다 배구가 더 재밌어요. 나이 들수록 자신감이 더 생겨요. 마흔 살까지 한 번 해볼까요? 하하.”
 
용인=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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