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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죽어서 어디로 갈까?

중앙일보 2019.11.24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5)

2004년 갑작스러운 부고 한장이 날아들었다. 나와 친했던 한 여자의 죽음이었다. 그녀 나이 40세였고 그때 나는 서른 후반이었다. 우린 함께 속내를 털어놓던 사이였다. 까칠한 남편 성격 맞추며 초등학생 아들 둘을 돌봐가며 평생 맞벌이했던 그녀였다. 아침 출근해 커피 마시고 오전 근무하다 화장실 간다며 나갔다는 그녀. 그것이 생전 그녀를 마지막 본 공장 동료의 진술이었다. 여자는 영영 아내와 엄마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당에 쓰러진 그녀를 직원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젊은 그녀의 사인(死因)은 과로사였다.
 
모든 죽음이 슬프지만, 어처구니없던 그녀의 몰락은 내게 오래도록 충격이었다. 더 슬픈 것은, 뇌사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던 그녀를 찾아갔는데 생리는 계속 흘러나와 시트를 붉게 적셨다. 후문에 의하면, 그녀를 염할 때도 입관을 할 때도 계속 출혈이 있었다고 했다. 그 붉은 얼룩처럼 내 가슴에 유독 오래 남았던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삶의 마감을 앞두고 기도 하나를 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생리 중에 죽지 않게 하소서….'
 
나와 친했던 그녀의 죽음은 내게 오래도록 충격이었다. 젊은 그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정말이지 대부분의 죽음은 예고가 없다. [사진 pixabay]

나와 친했던 그녀의 죽음은 내게 오래도록 충격이었다. 젊은 그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정말이지 대부분의 죽음은 예고가 없다. [사진 pixabay]

 
같은 여자라 그랬을까? 유난히 나를 스산하게 했었다. 찬바람이 불면 일교차가 심해진다. 이상이 없던 우리 몸의 순환에 제동이 자주 걸린다. 연세 드신 분들은 더할 것이다. 젊은 삶들이라고 예외도 아니다.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다. 과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과로사로 삶의 끈을 놓치는 것에 어디 남녀노소가 따로 있으랴. 등이 휘는 삶의 무게에 쫓겨 잘 안되겠지만, 제발 우리 조금씩 쉬면서 살기로 노력하자.
 
가난을 이기기 전에는, 또는 내 꿈을 이루기 전에는, 억울해서 죽어도 못 죽는다는 말로 웃어넘길 때도 우리는 간혹 있다. 정말이지 대부분의 죽음은 예고가 없다. 노부모는 물론이고 혈기왕성하고 든든했던 남편도, 건강하고 아늑했던 아내도,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끔찍한 경우가 너무 많다. 상가에 모인 구두들처럼 그 무수한 죽음들은 다 어디로 가서 발을 뻗고 쉬는 것일까? 한번 떠난 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데 그 많은 죽음들은 순간 모든 이승의 인연을 놓고 어디로 가서 쉬고 잠을 청하는 것일까?
 
몇 달이 흘렀을 때 그녀가 내 꿈속에 찾아왔다. 잘 지내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사진 pixabay]

몇 달이 흘렀을 때 그녀가 내 꿈속에 찾아왔다. 잘 지내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사진 pixabay]

 
그녀를 땅에 묻어주고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 오래 울었다. 그 후 한동안 쌀을 씻을 때마다 나는 울컥거렸다. ‘밥….’ 대체 이게 뭐라고, 사람이 죽었는데도 이것을 먹기 위해 매일 이렇게 쌀을 씻고 밥을 하는 것일까. 수시로 삶이 허무하다.
 
몇 달이 흘렀을 때 그녀가 내 꿈속에 찾아왔다. 나는 꿈속임을 알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요? 그곳은 어때요? 괜찮아요…?”
 
내가 물었더니 그녀가 비스듬한 언덕 위에 앉아 먼 들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 나는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다행입니다. 평생 단 하루도 못 쉬고 지금까지 일했잖아요. 그곳에서라도 부디 편히 쉬세요. 이곳 걱정은 말고.”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제발 우리 조금씩 쉬었다 가자. 아프지 말자. 오늘이 마지막인 듯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한다 아낀다는 말도 하면서 살자. 고맙다는 말도 하면서 살자. 나도 가능한 많은 이들과 더 많이 웃고 따뜻한 마음을 고백하면서 살아야겠다. 오래전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와 쓴 시 한 편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 올린다. 오늘 당신의 하루가 이번 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길 바라며….
 
 - 김명희
 
 
젊은 여인 하나 땅에 묻고 돌아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밝혀줄 밥을 안친다
 
새하얀 쌀을 곱게 씻는 일은 또 하나의 제사,
어느 누군가의 늦은 귀가를 위하여
나를 하얗고 부드럽게 풀어 익히는 일
그 여인, 이젠 분주한 땅 속 인심을 배우려
오늘 저승의 저녁 한 끼쯤은 잊고 있을 시간
 
지금 나는 지쳐있다
 
그녀의 마지막 길,
잘 가라고 관 위로 한 줌 흙을 던져주었던 손으로
오늘은, 야광 같은 포만을 일구기 위해
솥 안으로 한 줌 쌀을 던진다
내가 눈부심을 꿈꾸는 한, 나의 삶은 그녀 앞에서 사치다
 
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남은 자들 입맛에 맞춰 밥을 짓는다
내 염치를 쌀 씻듯 씻는다,
아직은 먹어야하는 안일을 익힌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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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김명희 시인·소설가 필진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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